[워싱턴에서] 테러전 진정한 승리자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지난주 ABC방송의 시사프로인 ‘나이트라인’에 출연했다. 전립선암 수술을 받느라 지난해말 입원한 이후 첫 TV 출연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북핵과 테러, 이라크전쟁 등 올해의 미국 외교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던 중 느닷없이 “미국인들은 정말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5단계 중 두번째로 높은 테러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맞은 연말연시 동안 미국인들이 보인 반응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미국의 이번 연말연시는 정말 영화보다 더했다. 하늘이 폐쇄되고, 20대가 넘는 미국행 비행기의 운항이 취소됐다. 저격수가 군중들 속에 배치되고, 핵 과학자들이 골프백 속에 방사능탐지기를 숨긴 채 길거리를 수색했다.


이같은 살벌함 속에서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 뉴욕 맨해튼에는 사상 최다인 1백만명이 운집했다. 라스베이거스에도, 미식축구장에도 사람은 줄지 않았다. 파월 장관은 “비록 테러경보가 높아졌지만 미국인들은 늘 하던대로 했다”며 “테러리스트들이 우리를 책상밑으로 숨도록 위협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요즘 미국 사람들이 테러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비상식품 등을 사재는 등의 소동은 이젠 없다. 9·11때 테러를 당했던 국방부 인근의 쇼핑몰은 ‘위험지역’임에도 쇼핑인파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비록 다른 나라들과의 갈등을 빚는 등 난리법석을 떨긴 했지만 이번 연말연시는 물론 9·11 이후 미국내에선 한건의 테러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선 미국의 대테러 전략은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진짜 이기고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많다. 당장은 돈문제다. 오렌지경보를 유지하는 데 드는 경비는 1주일에 1조원 넘게 든다고 한다. 9·11 이후 안보비용으로 지출된 돈만도 무려 1백20조원이었다고 한다. 이 돈은 가뜩이나 사상 최대의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 정부를 압박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결국은 미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와야 할 돈이다.


외국과의 갈등도 그렇다.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자국의 안전만을 위해 안하무인식 조치를 잇따라 시행하다 보니 브라질처럼 ‘보복 지문채취’라는 유례가 없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이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속에 뿌리깊게 남아있게 된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선 뼈아픈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외형적 무사함’이 과연 미국의 승리냐는 것이다. 전직 CIA 간부는 “알 카에다는 우리가 지금 보이고 있는 반응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면서 “이는 알 카에다의 또다른 승리”라고 말했다. 자신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붙잡힌 적이 없는데도 미국은 국력을 심각히 낭비하고 있고, 동맹국들간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싸우지 않고도 이기고 있는 셈이다. 미국민들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당장은 ‘용감’일지 몰라도 결국 ‘불감(不感)’이 되면 이 또한 테러리스트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테러리스트들이 이 땅에 활개치는 것을 좋아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 취하고 있는 방식들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테러를 조장시키는 측면도 있다. 미국처럼 땅은 넓고 사람은 적은 곳에선 아무리 경계를 강화해도 완벽한 안전은 불가능하다. 테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해 그 치유책을 국제사회의 ‘자발적 공조’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 더디긴 하겠지만 확실한 지름길이다.


〈정동식 특파원 dosjeong@kyunghyang.com〉



최종 편집: 2004년 01월 11일 18: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