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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산불은 '재앙의 묵시록'0

03-11-03 지구인 1,381
해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청명하던 하늘도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여기는 미국의 연방재해지역 캘리포니아다. 열흘 가까이 계속된 산불로 LA 시내에서도 매캐한 공기로 목이 아프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하얀 파편들이 내려앉아 휴지로 닦으면 시꺼먼 재로 변한다.
 
산불이 타고 있는 앞에서 라운딩을 즐기는 골퍼들이 화제가 됐던 초기의 느긋함은 간데없고 사상 초유의 재난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산불은 샌버나디노, 샌디에이고를 거쳐 레이크에로헤드까지 번졌다. 한인들 밀집지역을 삼키고 지나간 탓에 타버린 집을 바라보며 울고 있거나 황급히 짐을 싸는 한인들의 모습도 적잖다. 천만다행으로 한인들의 인명피해는 없다.
 
현재까지 파악된 사망자는 18명. 그 가운데 유독 기자의 눈을 아리게 했던 것은 마을 전체가 불에 휩싸인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차를 몰고 나오던 일가족 얘기다. 끝내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안 아들이 어머니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이제 끝인 것 같아요"라고 작별을 하는 뒤로 어린아이가 "아빠, 뜨거워"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TV에서는 식구들이 다 피난가고 타버린 울타리 곁에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개 한마리를 보았다. 소방대원들이 아무리 잡아끌어도 꼼짝하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남의 집을 구하는 동안 정작 자기집이 다 타버린 소방대원은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을 비로소 가졌는데…"라며 허탈해 했다.
 
화재현장에서 방송차에 불이 옮겨붙는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NBC 기자는 계속 현장중계를 하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가하면 불길이 마당을 넘보고 있는 중에도 후일 보험 처리에 대비해 집안 구석구석을 미리 촬영해 놓는 용의주도한 사람들 얘기도 있었다.
 
통상적으로 캘리포니아는 10월에 불이 많이 난다고 한다. 여름 내 바짝 말라 있던 데다 인디언 서머의 이상고온이 겹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방화로 추정하고 있는 이번 화재에 대해서는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재앙이다' '묵시록의 현장이다'라는 말을 하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라크는 테러전으로 폭발하고 캘리포니아는 불타는 내우외환에서도 미국 대통령은 "나의 지도력 아래 세계가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로우며 미국은 더욱 안전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다음 선거 모금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치가들이 '뜬금없는 말'을 하는 데는 이미 국내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지만, 정말 '한수 위'다. 세상에는 유색인종·백색인종 외에 '정치인종(種)'이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하다.

LA(미국)〓김홍숙 특파원 hskim@hot.co.kr기자 ⓒ[굿데이 11/02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