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은 실상이다0

03-08-01 지구인 671
앞서 '空'을 실상이라고 했다.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점이다.
서양의 의식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냥 없다고 보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반면, 동양은 '없음'마저도 있다고 보았다.

언어로 보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한자나 우리말에서는 '있다(有)'와 '없다(無)'란 말이 독립어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영어에는 '있다(exist, be, ..)'란 말만 있을 뿐, '없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부재를 뜻하는 말로 'absence'가 있긴 한데 이는 'sence'에 부정의 접두사인 'ab'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의 유추로는 '지각(-sence)할 수 없는(ab-) 것'이란 어원을 가진 것 같다.
여기서도 서양인들의 존재의 유무를 결정하는 잣대를 알 수가 있다.
바로 존재하냐 아니냐는 인간의 지각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근대이전의 학문체계가 서양보다 동양이 월등했음은 이제 공공연한 상식이다.
현대문명의 초석이 되는 현대수학, 그 현대수학의 밑자리가 되는 것은 십진법과 아라비아 숫자이다.
그런데 이 십진법과 아라비아 숫자는 '0'이란 기호가 없었다면 절대로 성립될 수 없었다.
이 '0'이야말로 없음조차도 하나의 존재로 인식했던 동양정신의 정수이다.(부연설명을 하자면 아라비아 숫자는 사실 인도에서 만들어졌고 이를 유럽에 알린 것이 아라비아였기 때문에 아라비아숫자로 불리운다)

유럽이 한참 미망에서 눈을 뜨려고 하는 계몽시대 때도 산술은 특정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이었고 비전(秘傳)이었다.
그들의 로마숫자체계로는 고등수학은 커녕 기초적인 산술지식도 구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 일반 서민들을 불문하고 그들이 각종 거래상의 계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반드시 그 지역 수도원의 신부 입회하에 했어야 했다.
당시 산술은 수도원에서만이 가르쳤고 전수하는 신성불가침의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활발해진 동서무역을 통해 중동지역의 문물(그 또한 대부분이 동아시아의 문물)들이 유럽에 소개되었고 그 와중에 아라비아 숫자도 포함된다.
유럽의 상인들은 이 간결하고 매력적인 수체계에 흠뻑 빠지게 되고 아라비아 숫자는 급속도로 유럽전역에 전파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와 이권에 치명적인 위협을 느낀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악마의 지식'이라고 낙인찍으며 금기시하였다.
지식기득권자들의 이러한 횡포가 어디 아라비아 숫자 뿐만이며 근대유럽 뿐만이겠는가만.

현대문명의 기반은 이렇듯 순전히 동양정신으로부터 태동된 것이다.
물론 서양의 분석적이고 객관성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그에 날개가 되어 주었음을 결코 부인할 순 없다.
어쨌든 조만간에 다시금 동양의 심오한 사상체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구현에 그 진가를 발할 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