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의 신비를 벗기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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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4 바람 759


KBS 1TV 「사이언스 21-심해 생명체의 비밀」
심해의 신비를 벗겨라

윤 진 규 KBS 교양국 PD



TV란 매체를 통해 과학을 다루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단 과학적인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을 만들어내기 힘들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인 소재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순수과학을 소재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년까지 총 20부작으로 만들어질 KBS 「사이언스 21」은 책 속에 갇혀 있었던 과학을 끄집어내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알기 쉽게 풀어보는 프로그램이다.

기획 초기에 제작팀이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은 시청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볼 수 있는 아이템 발굴과 자칫 잘 소화되지도 않을 과학적인 지식을 어떤 접근방법을 갖고 프로그램이란 틀 속에 넣느냐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과학탐험의 첫 번째로 우리 나라에서 생소한 연구분야이지만 몇몇 선진국에선 미래과학의 한 분야로 전략적인 투자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심해의 생물들과 그들의 생존전략을 담아보기로 했다.



심해 잠수정을 타고 탐사 시작

지구는 70% 이상이 바다로 둘러싸여져 있고 바다의 95%가 200미터 이하의 깊은 바다인 심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우리는 달보다도 지구에 있는 심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심해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은 깊은 바다를 인간이 탐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 바다는 수심 100미터가 넘어서면 햇빛이 차단된 암흑세상으로 바뀐다. 뿐만아니라 수압은 수심 10미터씩 내려갈 때마다 1기압씩 늘어나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수심 11000미터)는 사람 손톱 위에 1톤이 넘는 코끼리를 올려놓는 것과 똑같은 압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심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탐사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과학이었다. 특히 사람을 태우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 안전하게 탐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심해 잠수정의 개발은 탐사의 핵심이다. 바로 잠수정이 인간과 심해 생물의 중매쟁이인 것이다.

프로그램 제작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도 심해 잠수정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선 수심 200미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연구용 심해 잠수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외국에 있는 연구소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심해 잠수정을 이용해 심해 생물을 탐사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등 세계에서 5개 국뿐이다. 하지만 한 달이 넘게 걸리는 일정과 엄청난 비용이 드는 심해탐사의 특성탓에 외국 연구소의 문을 비집고 우리 취재팀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무려 3개월의 접촉 끝에 취재팀의 동행탐사 계획을 받아들인 곳은 미국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몬트레이 연구소였다. 1987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심해 생물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기관으로, 전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보통 미국에 살고 있는 연구원들도 1년 전에 신청해야 탐사에 동행할 수 있었는데 우리들은 정말 운좋게 취재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백만 달러(한화 12억 원)짜리 장비 보험에 드는 것을 조건으로 동행한 탐사는 수심 1,500미터를 탐사할 수 있는 벤타나란 무인 잠수정이었다. 3대의 고성능 카메라를 잠수정에 장착하고 케이블을 연결해 모선의 모니터를 통해 깊은 바다를 들여다보는 방식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심해탐사, 그 중 만났던 가장 인상깊은 심해 생물들은 몸속의 내장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심해 오징어, 섬모를 이용해 무지개 빛을 내뿜는 빗해파리 , 배 밑의 발광기관을 이용해 포식자를 따돌리는 샛비늘치 그리고 수심 1500미터에서 발견한 다리 달린 세다리 물고기였다. 마치 우주에 살고 있는 외계인의 모습을 잠수정이 포착해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동행한 탐사의 책임자는 올해 나이 쉰 일곱의 심해 생물학자 브루스 로비슨 박사였다. 그는 희한한 생김새의 심해 물고기를 만날 때마다 너무 아름답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보기엔 징그러운 생물이지만 물고기들이 심해의 악조건에서 잘 적응했을 뿐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탐사내내 모니터에 눈을 떼지 않고 관찰하고 있는 노과학자의 모습에서 과학발전은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이 만들어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해의 에덴 동산, 열수분출구

우리가 심해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속에 희귀한 심해 생물들이 산다는 것 뿐만아니라 바로 생명 탄생에 대한 비밀이 심해 생물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의 열쇠를 향한 첫걸음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한 지질학자의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했다. 1977년 미국 우즈홀 연구소의 지질학자 밥 발라드 박사는 갈라파고스 군도 부근에서 심해 유인 탐사선 앨빈호(수심 4500미터급)를 타고 바닷속 화산활동의 증거를 발견하기 위해 탐사에 나섰다. 그는 수심 2500미터 부근에서 뜨거운 물이 솟구치는 곳을 발견했고 주변에 2미터가 넘는 관벌레, 어른 주먹만한 조개와 홍합 등 거대한 생물군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고 말하는 심해 열수분출구의 첫발견이었다.

열수분출구는 심해의 온천수로 화산활동에 의해 지각의 중금속과 황화수소가 뜨거운 물에 섞여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주변의 생물들은 독성물질인 황화수소를 이용해 유기물을 만들어내는 박테리아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폼페이 벌레라고 불리는 심해 갯지렁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에서 사는 생물로 알려졌는데 무려 100도에 가까운 고온에서도 끄떡없이 산다. 몸을 둘러싼 털주변에 고온에 견디는 몇 종의 박테리아들이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45억 년 전 지구가 탄생한 이후 열수분출구에서 맨 처음 생명이 탄생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산소가 거의 없는 고온 고압의 열수분출구가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했을 때의 환경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열수분출구 주변에선 생명을 이루는 기본물질인 아미노산이 발견되었고 화학작용을 통해 열수분출구에서 아미노산이 합성된다는 사실까지 증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수십 종의 원시 박테리아도 열수분출구에서 발견되었다.

미국 NASA에서 진행하고 있는 외계생명체탐사 계획도 알고보면 화성에서 열수분출구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열수분출구와 그 생물들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 취재를 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우리 나라엔 하나도 없는 폼페이 벌레같은 귀한 열수분출구 생물들이 일반 대학에서 표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표본을 관찰하고 현미경을 통해 박테리아를 들여다보는 모습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원동력이 바로 기초과학에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과학은 희망이다

‘심해 생명체의 비밀’편이 방송된 후 인터넷 게시판에 기억에 남는 한 시청자의 의견이 올라왔다. 어릴 때 학교에서 투명한 물고기나 발 달린 물고기를 그리면 학교 선생님이 세상에 그런 것들이 어디 있냐고 야단을 쳤는데 방송을 보고 자기의 어릴적 상상이 맞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정말 고맙다는 의견을 올려주었다.

기획단계의 우려를 한꺼번에 풀어주는 시원한 말이었다. 결국 우리가 어렵게 시작한 모험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부디 「사이언스 21」을 통해 우리 나라의 많은 청소년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었으면 좋겠다. wookam@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