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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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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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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
김 경 재**
*이 글은 1995년 기독교장로회총회 전야집회, 임마누엘 신학강좌 원고를 보완한 것이다.
**신학과 교수/조직신학
<차 례>
[1] 주제가 밝히려는 것
[2] 왜 특별히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에 주목하는가
[3] 전통적 초월신론을 넘어서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해로
[4] 구원사와 인간의 역사성 안에 계신 하나님을 넘어서
[5]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시는 하나님
[6]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
[1] 주제가 밝히려는 것
에베소서 4장 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 구절은 오늘 우리 논제의 핵심언어가 되므로 성경원어와 영어, 한자어, 한글의 번역본으로 먼저 본문을 읽어보려고 한다.
헬라어 원어 : eis theos kai pater panton, ho epi panton 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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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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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ton kai en panton.
영어본(RSV): one God, and the Father of us all, who is above all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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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all and in all.
現代中文譯 : 我們只有一 位上帝, 就是人類的父親, 他在萬有之中, 統御萬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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貫徹萬有.
개역한글역 :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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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도다.
공동번역 : 만민의 아버지 이신 하느님도 한 분 이십니다. 그 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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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표준 새번역 : 하나님도 한 분 이십니다. 그 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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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오늘 성경본문이 말해지는 상황과 문맥은 그리스도 교회와 교인들의 일치를 간절히 권면하는 바울사도의 옥중편지를 받고 있는 초대 이방교회 목회현장이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희망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임을 강조한 후, 그 모든 "한" 신앙의 최종 근거가 되며,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밝힌다. 그런데 그 한분 하나님은 어떤 중성적인 우주원리, 자연법칙, 또는 우주생성의 근원질료가 아니라, 만민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이다. 그 만민의 아버지요 오직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은 어디에서 어떻게 계시고 일하시느냐 하면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신다"는 고백적 증언이다.
오늘 우리들의 논제는 에베소서 4장 6절에 증언고백되는 성서적 하나님의 삼중적 계시의 장(場), 또는 생존하시는 영원자 하나님의 삼중계시적 현존양식을 입체적으로 이해하여 오늘 그리스도교회의 선교사명과 급변하는 문명전환시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점을 두어야 할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dia panta)를 중심축과 연결고리로 삼고 "만물 위"와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간과하는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 신앙은 단지 영지주의적 초월신론에 빠지며, 다른 한편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 신앙은 범신론적 내재신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성서적 하나님 신앙의 정체성을 바르게 지키고, 초월신론과 내재신론의 양극화 현상을 균형 잡아주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고 하나로 통전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바르게 고백될 때,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메시야적 공동체의 역사참여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며, 성육신적 영성의 참 뜻이 드러나며, 창조질서 보전의 신학적 근거가 바로 정립되며, 역사와 자연을 함께 아우르는 전일적 계시의 장(場)이 정당하게 확보되기 때문이다.
[2] 왜 특별히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에
주목하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에베소서 4장 6절에 나타나는 짧은 한 구절 속에서 바울은 그가 조상적부터 믿고 경험한 하나님의 신비를 세마디 전치사를 통하여 절묘하게 묘사하였다.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과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사고의 범주는 성경이 증언하는 이 절묘한 세마디 전치사로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현존방식, 계시적 사역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은 3차원의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물 위에 계신 이"가 동시적으로 "만물 안에 계신 이"가 되며, 더욱이 그와 동시에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이"가 된다는 이 삼중적 동시성을 이해 할 논리적 구조를 지니지 못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하나님의 세 차원의 계시 경험은 신앙 안에서, 성령의 조명 안에서는 이해되고 체험된다는 역설을 기독교인은 체험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 또는 창조의 시간, 과정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하나로 통전하고 꿰뚫어 동시적으로 경험하시는 시간의 주 하나님이시며, 위와 아래 또는 저곳과 이곳을 동시에 통어하시고 관철하시는 공간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혁파교회 신앙 전통을 물려받고 그 흐름에 서 있는 기장의 신앙 공동체가 "만물위에 계시는 하나님"과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특별하게 그리고 더욱 세삼스럽게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주목하는가? 그 이유는 21세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영성이 자각적으로 강조해야 할 신앙적 패러다임은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교회공동체로서와 영적 존재로서 기리스도인 개인 실존들이 책임적으로 응답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자각적으로 동참해야 하는 성숙한 "성인의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유신론과 범신론, 초월주의와 내재주의, 창조론과 진화론, 기도원의 영성과 해방의 영성, 등등 바람직하지도 않고 진리이지도 않는 양극화 현상과 신앙지성의 긴장 갈등을 극복하고 바른 성경적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 지구촌이 현실화 된 가운데서 인류문화사를 돌아보건데 인간문명의 다양한 세계관은 그 문명권이 담지하는 신관의 성격과 결부되면서 크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져 전개되어 왔다. 첫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등 셈족계통의 기원을 가진 유일신 종교및 플라톤적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서구종교문화사 속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초월성, 절대성, 주권성, 피조물과의 질적 차이가 크게 강조되었다.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 곧 신의 초월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은 범신론에 오염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극도로 경원시되고 억제 되었다. "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모습은 근대과학 진화론과의 불필요한 갈등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 지나치게 역사화 된 사고 방식속에서 덜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구원사 도식 속에 유폐되든지 실존론적 역사성 속에서 해소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만물을 통하여" 라고 말 할 때 "만물"(panta)의 개념이 "역사"라는 말로 축소되었거나, 인간학적 내면세게의 "역사성"의 의미로서 축소되었다.
둘째,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등 인도계와 중국계의 종교문화 곧 아시아적 정신문화 속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 범신론적 내재신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언제난 "내재의 원리", "동일성의 원리"에 의하여 희생되거나 약화되었다. 아시아적 영성 속에서 "궁극적 실재"는 언제나 인간본성, 불성, 도심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파악되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유 초월자에 대한 경외, 찬양, 예배, 감사는 희생되거나 희미하게 약화되었다. 아시아적 종교는 그 결과 자연속에 몰입되고 자연과 하나되는 자연신비주의를 낳았지만, 새 하늘과 새땅을 창조해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응답에 실패했다. 역사의 새로운 지평, 약속의 언어, 희망의 언어를 동양 아시아적 고등종교들은 모른다. 한마디로 종말론이 부재한, 그래서 역(易)에 기초한 우주자연의 순환론이나 인연생기설이 있을 뿐이다. 아시아적 종교문화사속에서 만물은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지만, 만물의 운동과 변화가 목적지향적 성격을 가지지 않은 것은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주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와 뜻에 대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근대과학 혁명 이후로, 계몽주의시대를 거쳐 현대의 전자 정보화사회와 고도 기술공학문명을 이루어낸 현대과학적 세계관은 오직 변화, 생성, 과정, 진화, 형태변화 개념으로서 존재와 사물을 파악한다. 역사와 자연을 초월한 "아르키메데스 점"은 부정되고 만물은 창조적 진화과정, 창조적 생성운동 속에 있으며, 시간의 불가역성을 그 핵심특징으로 지닌체 "혼돈에서 질서로, 단순생명에서 고도 복합생명단계로, 개체에서 개체의 집합생명으로" 변화해가는 운동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실재가 의미를 지니려면 이 창조적 과정과 유기적 관련속에서만, 그리고 창조적 과정속에 내적 관계성을 지니고서라야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근-현대 과학의 실재관도 시공초월적인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 실재를 이해하고 설명 파악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임이 밝혀지고 있다. 근-현대 과학적 세계관은 성경이 말하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론적으로 부정함으로서 만물의 변화, 생성, 과정, 진화의 운동현상이 목적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우연의 산물, 우주존재가 스스로 혼돈의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출해 나아가는 다원적 현상세계가 있을 뿐이라는 실재관을 가져다 주었다. 거기에서는 한 인간의 존엄성은 우주의 거대한 운동 속에서 하나의 미세한 계기점에 불과 하며, 역사의 모든 변화변천은 바닷가의 모래성 쌓기에 불과 하게 되기 때문에 가치관의 다원주의, 상대주의, 불가지론, 또는 허무주의, 인본주의 만이 남게 된다.
현대과학적 세계관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고, 역으로 현대 기독교는 근대 뉴톤적 자연과학의 실재관에 의해서 부지불식간에 양향을 받았다. 근-현대 성서연구에 있어서 "역사비평적 연구방법"이 이룩한 커다란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적 역사비평학의 성서연구방법은 뉴톤-데까르트적, 인과율적 실재관에 의해 이미 전이해적으로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의한 제약을 받고 있다. 그 결과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창조해 가시고 구원해 가시는 놀라운 "하늘과 땅".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범주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발상법, 곧 초월주의적 신관, 내재주의적 신관, 자연과학의 현상학적-진화론적 실재관을 모두 비판적으로 넘어서서, 성경이 증언하는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삼중적 현존방식을 바르게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활동에서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며, 동시에 과정적인 세가지 하나님 얼굴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전되어 있으며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계시적 현실이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교부시대 헬라철학에 의해 이미 영향받은 서구 기독교신학의 초월신론도 아니며, 아시아 종교문화사가 강조하는 범신론적 내재신도 아니며, 근-현대 과학적 세계관이 말하는 생성변화나 과정에 숙명적으로 메인 과정신도 아니다. 성경이 전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 삼중적 신 체험의 본질을 다함께 갖추고 있는 한분 하나님으로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최근 율겐 몰트만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하여 오늘날 하나님론 의 문제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의 "하나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서 생명의 영으로서,창조의 영으로서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인식의 문제"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몰트만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 책에서 몰트만의 주 관심은 "하나님의 거하심"(쉐히나, Schechina)과 "하나님의 자기제한"(침춤, Zhimzhum)에 있었지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에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책이 오늘날 생태위기 속에서 "생태학적 창조론"을 제시할 필요성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내재주의 신학원리를 비판한 20세기 초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운동의 정당성에 공감한다. 혈통, 국토, 민족, 국가 이념, 문화가치, 인간의 윤리성과 종교성의 최고 형태를 곧바로 하나님의 뜻과 계시라고 우겨대는 인본주의적 자연신학을 비판하고 나온 20세기 초 계시신학운동의 정당성을 확고히 지지하되, 그 때 20세기 초엽 교회가 당면하고 대결해야 했던 신학의 관심주제에 더 이상 오늘의 신학이 머물러 있거나 거기에 매여 있고서는 오늘의 신학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하면 신학적 사명과 교회의 선교과제도 변하는 것이며, 새로운 시대상황에서 신학과 교회는 "만물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십자가와 부활의 빛에서 증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기에로 불러오는 나팔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며, 동시에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몰트만도 위 책에서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많이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몰트만의 최근 책을 많이 참조할 것이다. 특히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이 강연에서 우리들의 목적은 조직신학적 한 주제를 관심해서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우리들의 실질적 관심은 희년공체로서의 우리들의 열린 영성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실천적 참여의 영성, 역사비평학적 과학적 성서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 초월적 지평과 내재적 지평이 하나로 만나지는 연결점으로서 과정적 지평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전제하며 완성한다"(Gratia non destruit, sed praesupponit et perficit naturam)는 고전적 교회 교부들의 신학적 언어를 오늘에서 다시 그 의미를 음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위 중세 교부들의 신학적 명제의 앞부분 곧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뒷부분은 은혜와 영광, 역사와 새로운 창조, 그리스도인의 현세적 존재와 완성된 종말적 존재 사이에 있는 질적 변화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몰트만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신학이 종말론적 메시야 대망의 신앙, 십자가의 신학, 희망의 신학 원리위에 있으며, 현재 교회와 그리스도의 실존은 영광의 왕국과 메시야적 하나님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순례자적 공동체요 영구개혁의 과정 속에 있는 도상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개혁신앙 전통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 토마스 신학과 몰트만의 신학이 보여주는 견해 차이는 여기 우리의 논제에서 중요하지 않다. 은총(초자연)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동일관점으로서만도 족하다. 이제 우리는 좀더 자세하게 근-현대 신학의 왜곡된 하나님 이해를 오늘 성경말씀의 빛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자.
[3] 전통적 초월신론을 넘어서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이해로
전통적으로 성서적 신앙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창 1:1)라고 하는 위대한 창조신앙의 고백 위에 있다. 이 창조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모든 것, 곧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높음이나 깊음이나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것들을 하나님이라고 말 할수 없으며, 그것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나님에 의해 지탱 보존되고, 새롭게 갱신되고 영광에 초대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만물은 하나님이 아니다.전통적 초월신론에서는 만물과 하나님과의 질적차이와 분리가 항상 강조되어 왔다.
이러한 위대한 창조신앙은 일찍부터 자연을 비신격화시켰고, 땅위의 모든 권세들과 가치들을 비신성화 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서 빛나는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열려진 미래를 살도록 미래를 개방시켰다. 가나안 바알 종교의 생산-풍요신에 대한 제의적 숭배나, 역사의 운명적 힘들과 지상 정치권력의 신격화를 우상숭배로서 규정하고 그 마법을 풀어버림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킨 것도 바로 이 위대한 창조신앙이다. 창조주에게만 오직 영광과 존귀를 드린다는 신앙은 니이체나 프로이드가 오해하는 것 같은 인간의 유아기적, 계몽기이전 시대의 가부장 권위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아니다. 정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성숙한 정신에서의 자율성, 자유로운 개방성, 주체적이고도 책임적인 역사성, 그리고 모든 형태의 우상으로부터 해방된 자로서의 인간존엄성 등을 지켜갈 수 있는 존재론적 능력의 원천이 되었다.
창조의 주로서 하나님의 세계초월성은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절대주권, 구원사역에서의 하나님의 先行性,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나타내는 매우 역동적인 신앙고백에 대한 공간적 상징표현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 위에 있다"는 말이나, "하나님은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은 곳, 하늘나라의 중심보좌에 계시며, 인간계 이 땅을 내려다 보신다"는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초월적 자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총의 불가항력성과 항상 인간의 사상을 뛰어넘어 놀라운 은총과 사랑으로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높으심과 깊으심에 대한 공간적 은유표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초월성 개념이 경직화되면서, 그리고 공간적 은유로서 신학적 언어가 실질적 공간개념으로 신화화 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현실의 분리 곧 창조주와 만유의 분리에까지 이르게 되는 비성경적 탈선이 기독교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점점 하나님의 현실성과 아무런 유기적 관계성도 없고, 하나님과 무관한 인과율적 우주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는 법칙적 세계로서 이해되어 갔다. 다른 한편 성경의 하나님은 저 하늘 위의 높은 영적 세계에서 천군천사과 죽은 사람들의 착한 영들에 의해 옹위되어 찬양을 받고 계시는 저 세상의 대군주와 같은 이미지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필요가 발생할 때에 임기응변적으로 그의 예언자 종들과 천사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구원사역을 지속시켜가는 것으로 인지되어갔다. 그리하여 시편기자가 노래하는 자연의 창조적 변화와 생동적 활동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 창조의 입김이 매순간 순간 관계하시고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는 경탄, 찬양, 감사, 경외감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야훼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 할지며, 야훼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 하실지로다.(시 104:29-31)
성경이 증언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서구 기독교 역사가 지난 2000년동안 그려놓은 그런 군주적 모습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자신이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이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피조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지니고, 자기의 하나님 됨을 과시해야 하는 지배적 군주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 군주들의 권위주의적 모습일 뿐이다. 도리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자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시기에, 피조물의 낮은 자리에로 깊숙히 들어오셔서 피조물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를 함께 맛보시는 하나님이다. 참으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스스로 제한할 수 있고 무력하게 하며, 자신을 비우고 낮추시며 피조물에게 적응시키시며,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의 시공간 속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절대자만이 군림하려하지 않고, 피조물들과 함께 사귀이고, 피조물 속에 침투하려 하시며, 피조물의 아픔을 함께 공명한다.(호 11:8-9, 사 54:7-10, 롬 8:26-27)
근세신학 이후, 자연을 포함한 만물 속에서 현존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실질적 창조솜씨를 강조하는 경우 범심론의 오염을 받지 않을까 염려하여, 부지불식간에 근세 이후 서구신학은 자연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기피하고 터부시했다. 그러한 역사중심, 인간구원 중심의 서구신학은 좀더 넓은 성경적 하나님 이해로 돌아와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피조세계가 창조 유지 지탱 보존되는 매순간 순간에, 특히 생명이 살고 죽고 변화하는 모든 생동적인 생명현상 속에 하나님의 창조의 입김,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함께 하신다. 창조세계는 죽어 있는 물질적 분자집합체가 아니라, 놀라운 창조의 바다요 창조적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는 광장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단지 신조로서 관념적으로 고백하지 않고 생명의 몸을 통하여 경험하면서 고백하려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이해를 함에 있어서 전통적인 초월신론적 군주적 이미지를 지닌 신관을 극복하고 임마누엘의 하나님 신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이란 도리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요 "그 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않고, 우리가 그를 힘 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는 분"(행 17:27-28)이기 때문이다.
[4] 구원사와 인간의 역사성 안에 계신
하나님을 넘어서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로 생각하고, 그 영광의 무대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가 전개된다고 보았던 서구 신학은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역사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변경시켜갔다. 그것은 만유(panta)를 자연범주와 역사범주로 이원화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장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계시의 텍스트를 역사와 언어로 표현된 경전으로서만 국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역사화는, 비록 성서적 신앙의 핵심적 특징이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를 통한 계시적 구원사건"이라는 신앙공동체의 원체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서구 기독교가 자연을 잃어버리고 역사의 광장에로만 몰입하게 됨을 의미한다. 점차로 기독교는 자연의 숲을 잃어버리고 도시의 성 안으로 들어가 도시문화의 종교가 되어 갔다. 하늘을 궁창으로 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고 바람과 번개를 시종으로 거느리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당과 신학체계와 종교의전에 갇혀가는 "전통의 축적물로서의 역사적 종교"로 변질되어 갔다.
성서적 하나님 이해가 헬라 철학을 만나면서 첫번째로 관념화 되어갔다면, 초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신앙은 특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근대 역사주의를 만나면서 또 한번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영역을 역사과정과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로 제약시킴으로써 국지화되고 세속화되었다. 창조세계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로 무한이 열려진 본래 그리스도인들 신앙실존의 경험지평은 오로지 앞을 향해서만 열려진 채로 제한당한 채 근세 역사개념 안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위, 아래, 옆, 앞으로 입체적으로 개방되었던 처음 그리스도교회의 생동하던 신앙이 평면적 수평차원으로 한정되고 말았다.
계몽주의가 인간의 진리인식을 리성의 한계안에서 가능한 것만을 과학적 진리라고 독단을 부렸듯이, 근-현대 역사주의는 다분히 인과율적 법칙과 진보론적 선형적(線型的) 사관에 길들여진 진보사관에 의해서 해석학적으로 패러다임 제한을 받게 되었다. 과학적 역사이성의 이름을 빙자하여 신앙의 대상, 신앙 고백의 항목, 그리고 인간 영성의 초월경험의 타당성과 진위성에 이르기 까지 역사이성은 신앙 위에 근거없는 독단적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 차원을 달리하는 영적 실재의 세계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 등은 모두 역사과학적 방법론과 역사이성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정되어 신화로 규정되든지 상징으로서만 평가받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 자체, 역사적 문헌의 기록 편집 전승과정의 진실을 밝히려는 탐구자세는 좋지만, 역사 과학적 밥법론을 동원하면 역사적 원사건을 그대로 재생 복원할 수 있다는 소박한 19세기 역사주의 신념은, 자연과학의 환원주의적 사고에 부지불식 간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2만 여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어 있는 자동차의 잔해를 모아 재구성하면 원래의 자동차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이 역사이해에도 부지불식 간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란 살아 있는 거대한 유기체의 나무와 같아서, 밖으로부터 나무의 생장발전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는 그 나무를 외면적으로 물리화학적 과정에 대해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나무의 내면적 생명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나무의 생명과정에 참여함으로서만 나무의 내면적 삶을 알 수 있을 뿐이다.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삶의 체험을 재생하려는 모든 해석학적 과정은 과거 정신적 삶으로서 역사가 이해자에 의해 해석되면서 이해되는 것이지, 과거가 그대로 복재되는 것이 아니다.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적 삶, 정신적 삶, 영적 삶의 내용이 오늘 여기에서 이해된다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지평융합"의 과정을 겪으면서 해석자 안에서 역사적 사건은 새롭게 부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이켜 성찰하건대, 20세기를 풍미해온 여러가지 신학적 흐름들, 예를 들면 구원사 일변도의 신학, 역사비평학적 성서연구방법에만 의존하는 성서신학, 인간의 실존론적 의미와 역사성에로 기독교 신앙 내용을 모두 해체시켜버리는 신학, 초대교회의 근본 케류그마를 사회정치적 시각과 그런 맥락에서만 해석하려는 사회학적 신학은 모두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 신학 들이 신학 연구의 한 방법론임을 넘어서 기독교 근본신앙을 실존적, 역사적, 정치사회적 차원으로 해체시키려할 때는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학연구 방법론 및 신학적 패러다임은 성경이 말하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총체적으로 해명하기엔 너무나 그 지평이 좁고, 단선적이며, 갇혀진 세계인 것이다.
20세기 자연과학이 밝힌 자연의 모습은 20세기 신학이 생각한 것과 같은 그러한 무대로서의 고정된 자연, 곧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의 드라마가 그 위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극장무대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진정한 위대한 연극에서는 무대 자체가 항상 연극의 일부로서 연극을 구성하는 것이며, 극중 인물과 극의 스토리 못지 않게 극의 무대는 연극을 구성하고 완성한다. 자연 그 자체가 하나의 당당한 "자연주체"(Natursubject, E.Bloch)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과 동역하면서 만물을 구원의 완성, 영광의 나라에로 초청해가는 알곡이 무르익는 생명의 들판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자연만을 말하지 않는다. 자연과 역사는 분리되어 있는 두가지 독립실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직조하고 있는 옷감의 직조 구성물인 것이다. 인간은 신의 창조물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그 안에 지니고 닮은 특수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거나 자연 위에 군림하거나 자연을 착취 학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연으로 부터 그 소재를 취함 받은 자연의 자녀인 것이다.
율겐 몰트만은 앞에서 말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책 안에서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의 본질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할 것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로서의 세게에 대한 모든 인식은 미래세계의 비유로서, 이 미래세계에 대한 은유적 인식이다. 이러한 기능에 있어서 자연신학은 성령론에 속한다. 다시말하여 "자연의 빛"은 영광의 빛의 전조(前兆, Vorshein)이다. 이 빛은 그 자체로부터 비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의 빛을 반사한다. 이 前兆는 메시야적인 빛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 메시야적 빛은 현재의 세계가 가진 고통을 드러내고, 자유를 향한 그의 동경을 생동하게 하며, 지금의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인 비유와 약속으로 인식하게 한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구분은 잘못된 것이다. 두가지 신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신학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위의 몰트만의 견해를 진지하게 음미한다면,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듯이 아시아적 종교전통에서는 성경적 계시신학이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나 세계 구원사역과는 전혀 무관한 이교종교사상일 뿐이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말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한분 하나님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성지와 지중해 연안부터 만주대륙과 록키산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만 아니라 바로와 느부갓네살과 징키스칸과 원효, 율곡에게까지 역사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시의 영을 보내사 그들의 길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신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어떤 한 종교나, 종파나, 교파나, 신성가족계보가 독점하려는 어떤 신학적 입장도 우리는 비판하여야 한다. 그것들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작은 손가락들이고 표지판들이며 계시의 흔적들일 뿐이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종교적 천재 엘리뜨들이나 선택받은 에언자 제사장 집단들에게 둘려 싸여 있는 분도 아니고, 이름있는 사람들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펴가시는 분이 아니다. 도리어 이름없는 무수히 많은 보통 사람들, 우리가 민중이라고 부르든 민초라고 부르든 그져 백성이라고 부르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신 선과 진리와 정의와 사랑만을 위하여 그들 양심이 말하는 대로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갔던 수많은 생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어져가고 실현되어 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을 만나고 듣게 된다.
[5]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시는 하나님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때, 만물 또는 만유(panta)라는 것을 좁은 의미의 역사개념으로 또는 인간학적 개념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위에서 누차 말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만물 또는 만유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 곧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않는 세계, 자연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 감각적 인지대상의 것이나 초감각적 예지계의 것, 자연이나 역사, 물질이나 천사와 하늘의 영들, 그 모든 피조물을 다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꿰뚫어 관통하시는 만유는 그렇게 넓고 깊고 높은 세계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사, 교회사, 또는 신구약 성경의 선택-계약-성취의 계보로 이어지는 좁은 의미의 선민적 구원사개념으로 축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영광의 매개체가 되고 구원의 성례전적 매질이 되는 萬有(panta)는 그러므로 계몽주의시대의 리성의 철학이 말했던 이성의 한계에 제한될 수도 없고, 역사주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관념주의 등 어떤 이념과 해석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제한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합리성에 대하여 더 많이 훈련하고 철저해야 하지만, 합리주의적 독단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검증받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더욱 치열해지는 포스트 모던니즘의 정신, 해체주의의 정신, 해석학적 脫中心主義 등이 말하려고 하는 중요한 핵심중 하나가 다름아닌 합리주의, 역사주의의 독단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다.
지난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진리체험의 범위와 그 내용의 진위성과 그 접근 방법까지를 규정하는 대심문관처럼 행세해왔던 합리주의와 역사주의의 진리인식 패러다임은 성경이 말하는 만유(panta)를 다 검증하기에는 너무나 좁고 낮은 차원의 진리인식의 방법적 도구이다. 그것들을 가지고서는 성경이 증언하는 핵심적 구원체험, 진리체험을 해명하지도 못하고 바른 신앙의 이해를 돕는 일에 봉사하지도 못한다. 그러한 방법론적 도구의 틀을 가지고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체험도, 변모산상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변화 체험도, 바울의 삼층천의 신비 체험도,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영화롭게 되리라는 만유의 영광화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젼도, 하늘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설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새 시대의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은 지난 300년동안 개신교 신학을 원천적으로 제약해왔던 합리주의와 역사주의가 지닌 진리체험에 이르는 방법론적 질고를 벗어버리고 신학과 신앙이 숨쉬는 자유로운 "진리의 영"이 주는 해석학적 초월을 결행해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 안에서 신학과 신앙적 인식이 "해석학적 초월"을 결행해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순수이성을 부정하고 역사리성을 부정한 후, 신앙이라는 독단적 교조주의나 영지주의적 영계로 탈출해 나아가자는 것이어서는 아니다. 도리어 그 결행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과 조명 안에서 보다 철저하게 이성적이 되고 보다 철저하게 역사적이 되어서, 그것들의 한계성을 돌파하면서 보다 넓고 밝은 진리의 체험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진리의 영" 안에서 이성은 그 인식론적 한계를 돌파하는 자기초월적 "황홀한 이성"(ecstatic reason)이 되고, 역사이성은 자기초월적 역사이성으로 홀연히 변화됨을 통하여 세속역사가 거룩한 역사로서 전환되는 내적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거룩한 시공간 체험은, 지금 우리 앞에서 전개되어가고 있는 구체적 세상살이 일 곧 하나님이 만유를 통하여 이뤄가시고 계시는 일의 비밀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까지 덮혀 있던 "눈의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눈이 열린다. 새롭게 만유를 밝히보고 께닫게 됨으로써 마침네 진리와 사랑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을 자기 생명 안에서 느끼게 된다.
이 점에서 만유위에 계시는 하나님은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거룩한 한 뜻"으로 전환되고, 거룩한 하나의 뜻은 역사를 혼란스런 잡다세계의 무목적적 생멸현상으로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거룩한 한 뜻"을 통하여 하나로 통일 함으로써 이 우주적 보편사는 "역사로서의 계시"의 場이 되고, 그것을 깨닫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합적 인격체 곧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의 형성을 통해서 의미있는 삶의 과정이 된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역사란 지나간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의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고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역사는 새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풀무다....역사적 사실은 골라진 사실이요, 해석된 사실이요,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 그 사실이 가지는 뜻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기록이란 씨알에게는 무의미하며 기껏해야 재료이다. 씨알은 그것보다는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를 요구한다. 세계의 밑으로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가지는, 말씀을 가지는 역사를 요구한다. '歷史意識'이라고 할 때의 '識'은 뚫어봄, 내다 봄, 맞춰봄, 펴봄이다"(전집 1, 36쪽)
"하나님은 우주과정의 뒤에 있어서, 그 흐름의 밑에 있어서, 그 생명의 속에 있어서, 자기 몸소의 즐거움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해 자기를 제한하여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이다......하나님을 못믿겠다면 아니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 있다....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그져 하나라 해도 좋다. 그 자리에서 우리 역사를 보자는 말이다."(전집1권, 19쪽, 42쪽)
함석헌의 대담한 역설적 표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위에서 말한 진리체험의 인식론적 패러다임 전환과정을 말해본다면 이렇다. 함석헌의 하나님체험은 에베소서4;6절이 말하는 "만물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그의 고난의 역사철학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속에서 그의 말로 다시 표현하는데, 특히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와 만물의 주 하나님, 역사적 과정과 역사의 뜻, 역사와 뜻의 구체적 담지자 또는 실천자로서 사람의 본 바탕을 잃어버리지 않은 씨알들, 이 세가지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서로 분리할 수는 없는 생명의 현실이라고 본다.
하나의 우주적 생명현실, 하늘과 땅을 모두 포함한 창조세계의 한 현실이 있을 뿐인데, 그 우주적 생명 현실을 위에서 보면 하나님이고, 그 과정에서 보면 역사이고, 아래에서 보면 씨알이다. 달리 말하면 그 우주적 생명의 처음과 나중에서 보면 하나님이고, 그 뜻의 실현과정에서 보면 역사 또는 구원사이고, 그 뜻의 담지자 실천자로서 보면 씨알이다. 씨알은 보통 사람이지만 하늘이 품수해준 선한 사람의 본 바탕을 잃어버리거나 부귀영화 때문에 팔아먹지 아니하고 험난한 인생을 고난 속에서도 지켜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말한다. 씨알들을 민중 또는 민초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씨알, 민중, 민초들을 죽이고 압살하는 것은 역사의 뜻을 죽이고 압살하는 것이고 마침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죽이고 압살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는 20세기 역사의 도처에서 민중, 민초, 씨알들의 항쟁과 울부짖음과 고난과 죽임당함과 부활을 보아왔다. 그리고 바로 역사의 담지자 민중과 민초들의 고난, 죽임당함, 그들의 역사를 통한 다시 일어섬과 함께 역사가 죽임당하고 부활되는 것을 보았으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 분노, 심판, 용서, 화해와 사랑을 체험해 왔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 신앙공동체로서, 희년공동체의 영성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6]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
첫째, 희년공동체의 영성은 성육신적 영성(incarnational spirituality)을 지향해야 한다.
"성육신적 영성"이란 "말씀이 육을 이루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증언이 가리키는 성육화하는 생명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거기에는 하늘과 땅,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그 양자 사이의 분리나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성육신적 오리엔테이션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본 훼퍼가 말했듯이 성육신적 영성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고 주기도문을 바르게 고백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성이다.
"성육신적 영성"은 정신주의, 물질주의, 영지주의, 신본주의 없는 인본주의, 인본주의를 부정하는 신본주의, 하늘나라와 초자연실제계를 부정하는 감각적 현실주의, 역사현실을 덧없는 그림자라고 외면하고 역사를 도피하는 피안적 타계주의를 모두 부정한다.
"성육신적 영성"은 은혜와 진리가 함께 아우르는 복음, 은혜와 진실이 함께 숨쉬는 복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실천적 영성이다. 한국교회나 기장교회의 양극화 현상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양자 모두 성육신 신앙을 교리로서는 받아들이지만 실질적으로서는 그에 이르지 못한 극단적 신앙 행태 때문에 나타난다.
성령의 은사와 은혜체험을 강조하는 한국의 일부 보수교회들은 역사 현실 속에서 진리, 진실, 정의를 몸으로 구현하려는 예언자적 정렬이 부족하여 제사장적 모델의 교회상을 이루게 된다. 교회는 현대사회 시민들의 종교성과 그들의 내면적 영적 갈증을 충족시키고, 상처받은 심령을 위로 치유함으로써 모성적 기능을 감당해 낸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급속한 양적 성장과 활발한 선교적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은혜와 진리" 중에서 은혜에 치우치고 진리에 소홀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그 거대한 물량적 현실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 사회에서 도덕적, 영적 권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 한국민의 신뢰와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 정의와 진실의 규명에 온 힘을 쏟는 일부 진보적 교회들은 역사현실 참여를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오늘에 구현하려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다. 그것도 성령의 은사요 열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현실 속에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교회들은 그 일을 추진할 수 있는 메마르지않는 영적 은혜, 능력의 근원에 이르지 못하여 교회는 부흥이 않되고, 복음의 충만한 자유의 능력은 무거운 도덕적 의무감정으로 변하여 버린다. 메마르지 않고 솟구쳐 넘치는 샘물처럼, 날개치고 오르는 독수리가 지니는 거룩한 열정이 부족하다.
위에서 말 한 양극단의 한쪽에 치우치는 영성이 아니라, 성육신적 영성은 하늘을 땅 위의 흙 속에,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만물 안에 임하게 하려는 영성이다. 한 쪽 날개만의 영성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라고 하는 두개의 건강한 날개를 갖춘 신앙인들로서 충만한 생명공동체가 되어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자는 영성이다.
둘째,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하나님-자연-사람"의 상호 내주적 사귀임을 확대심화 시키려는 영성이다.
희년공동체의 영성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들을 폐하시고,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평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엡 4:14-15)를 믿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성이다. 그러므로 그 영성은 상호내주적 사귀임과 평화를 지향하는 영성이다.
죄의 현실은 분리, 소외, 분쟁, 죽음의 권세로서 나타난다. 희년공동체의 영성은 하나님 따로, 자연 따로, 인간 따로의 분리된 창조세계가 아니라,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창조 현실을 고백한다. "상호내주적 사귀임의 영성"은 코이노니아(사귀임, 친교)와 디아코니아 (봉사, 섬김)를 창조세게의 전영역으로 확장 심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하나님과의 사귀임과 친교를 삶의 전과정에서 경험하면서 살아가려는 안식의 영성, 축제의 영성, 생명긍정의 영성을 지향한다. 장로교 위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고백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하신 능력, 그 영광, 그 은혜와 사랑, 그 통치와 거룩한 현존을 맛보며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는 영성이다.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에 의하면, 빛이 공기속에 퍼져서 대기와 창공이 빛으로 빛나며 밝아지는 때에도 빛과 공기가 하나로 동질화되지 않는다고 본다. 쇠가 용광로에 달구어져서 고온속에서 하나의 열의 불꽃 속에서 구별할 수 없을지라도 열과 쇠가 같은 동질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내주하며 사귀임을 회복하는 것은 은총의 빛이요 은혜의 불꽃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한경쟁의 노동의 윤리를 비판적으로 넘어서서 창조의 충만한 안식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다.
둘째, 자연과의 상호내주적 사귀임의 영성이란 자연을 더 이상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환경세계"로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몸을 이루며,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의 기초가 되는 내면적 상호관계적 피조물로서 대하려는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을 지난 시대 "뉴톤물리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파악되던 닫혀진 물리화학적 체계가 아니라, 모든 신비로운 것들과 놀라운 일들이 가득찬 다차원적 실재세계, 열러진 자연으로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은 근-현대 자연과학이 체계화한 선형적 인과율법칙체계로 구성된 원자집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부분적 자연현상은 전체자연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生起하는 전일적 세계로서 파악 한다. 동시성의 원리가 가능한 세계, 영들과 초자연적 힘들이 각각의 차원과 질서 속에서 하나의 그물망과 같이 연관되어 있는 세계로 본다. 창조된 자연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이해 설명하는 과학적 패러다임이 변하면 자연은 전혀 새롭게 보인다. 인간은 지구라고 부르는 하나의 "온 생명 나무"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금부터 약 350만년 전에 핀 영광의 꽃이지만,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결코 아니라는 것과, 자연을 돌보고 자연을 영광의 나라에로 안내해 가야 할 자연의 한 식구임을 자각하는 영성이다.
셋째, 인간과의 상호내주적 사귀임의 영성은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 해야 한다. 먼저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내주적 사귀임을 가로 막는 각종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들" 이란 현대사회에서는 냉천체제 잔재들인 정치이념들, 민족분쟁과 지방색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적 교리들, 인종차별의 문화제국주의적 우월감들, 성차별의 가부장적 편견들, 다국적 기업들의 무책임한 경제수탈 행위들 등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세로운 희년공동체의 열려진 영성은 인간의 "상호내주적 사귀임의 영성"을 산자들 간의 친교를 넘어서 성령 안에서 죽은 자와 산자들, 과거 현재 미래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영혼들이 서로 "성도의 교통"을 가질 수 있음을 믿는 영성을 의미한다. 그러한 영성의 패러다임전환은 전통적인 한국 개신교도 추도회 같은 가정의례에 대하여 근본적 재검토를 요청한다. 개신교 예배의식의 빈약성과 영성의 메마름은 개신교의 사도적 신앙이 주지주의화 되거나, 도덕주의화 되거나, 감성주의에 희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다양성 속의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 몸을 형성"하는 제자직의 영성이다.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새롭게 열리는 포스트 모던 사회에서 다양성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드린다. 삶의 체험이 다양하고 문화 양식과 역사 사회적 전통이 다름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전통의 흐름이 있으며, 세계 안에는 살아 숨 쉬는 다양한 종교들이 하나님의 신비함과 무궁하심을 그들 나름데로 그들의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만인 구원의 크신 경륜 안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궁극적 구원의 현실과 직간접적으로,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관계되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혜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다.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아시아 30억 인구를 향한 21세기 선교신학이 복음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지키면서 그 복음을 아시아적 문화의 토양속에 씨뿌리고 열매맺게 하도록 하는 선교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위대한 선교시대에 선교사들이 지녔던 선교열정과 복음에 대한 확신과 희생봉사 정신은 계승하고 더욱 키워나가되, 그 때 선교사들이 지녔던 서구문화 우월주의와 기독교 문화제국주의적 잔재, 그리고 복음 그 자체와 서구전통에서 축적된 역사적 기독교를 곧바로 동일시 하는 과오 등을 모두 청산한 새로운 선교신학 위에서 21세기 선교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성령도 하나, 교회도 하나"임을 고백한다면, 각교파간의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더욱 투철해야 하며, 자본주의 기업정신에 오염된 개교회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장로회 총회 산하 1,500여 교회는 농어촌 교회이거나, 도시 빈민지역 교회이거나, 도시교회 이거나 "교회는 하나, 그리스도 몸도 하나"라는 의식의 전환을 실천으로 옮겨 모든 개교회 예산의 2% 정도를 노회 혹은 총회에로 모아서 개척교회 운동과 교역자 최저생활보장제도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단순히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영성이 아니라 "제자직의 영성"이므로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실천신앙이요, 생활신앙을 의미한다. "제자직의 영성"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부르는 은혜의 소명에 몸으로 따라 나서는 영성이다. 그 분의 계명을 몸으로 실천 준행하여, 그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를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속 한복판에서 영적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성이다.
넷째,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민족의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려는 참여의 영성, 선한 진리투쟁의 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요, 진리로서 불의를, 사랑으로 미움과 증오를 이기려는 영성이다.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자유시민사회가 육성해온 개인 인간과 기업의 자유, 사회의 개방성, 잠재능력의 창의성, 삶의 당양성과 자발성, 선의의 경쟁성과 상보적 협동성 등을 귀중한 인류의 체험으로 계승해 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주의 사회가 꿈꾸어 왔던 인간 사회의 공동체의 비젼 곧 인간의 사회적 연대성, 평등과 노동의 소외 극복, 인간의 물화를 극복하려는 예언자적 정렬등을 수렴하는 민족공동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적 참여를 말한다.
진리와 자유는 문을 두드리고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참여적 투쟁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지 그냥 와지는 것이 아니다.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민족의 통일도 또한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구성원들, 특히 자유, 정의, 평화, 사랑의 인간다운 공동체의 실현을 꿈꾸는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통해서 이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진리를 거스리는 불의, 집단 이기주의, 소수인의 권력욕망,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고 기만하려는 역사왜곡 시도와 그러한 불의한 세력들에 대한 투쟁을 선언하는 영성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나그네의 삶임을 알기 때문에 순례자의 영성, 희망의 영성, 비우는 여백의 영성을 지향한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땅을 아주 팔지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 일 뿐이다"(레 25:12)고 말씀하신다 . 성육신적 영성은 이 땅을 영원한 집이라고, 마지막 집이라고 믿는 희망 없는 영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원한 나라,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 안에서 완성될 만물의 영광화를 대망한다. 성육신적 신앙의 진정한 뜻은 영원한 하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이 지금 여기에서 화육되어가는 생명의 영글음과 절대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자연의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고전 15:44, 46)
희년공동체의 열린 영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산 삼천리 강토 언덕 위에 잠시 놀다가도록 허락받은 나그네들이요, 임시 거주자 임을 알고, 일체의 허망한 탐욕, 권력욕, 명예욕, 과도한 소유욕, 일의 성취욕망으로 부터 자유하려는 영성을 말한다. 탐욕은 그것이 아무리 신성한 하나님 일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탐욕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우상숭배의 시도는 인간의 영원한 잊혀짐에 대한 불안의식에서 나오며, 잊혀지지 않으려고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시간과 공간의 벽에 새겨놓으려는 불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하신이가 우리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우리들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였다는 은총의 약속 안에서만 인간은 우상숭배와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 온갖 시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특히 아시아적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영성은 "여백의 영성"을 지향해 가는데서 서구적 영성과 다른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영성 특징을 드러 낸다. "여백의 영성"이란 동양 산수 수묵화에서 보듯이 화폭의 비어 있는 여백공간이 더 많은 그 무엇을 말하게 하는 것처럼, 언어로서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 체험을 더욱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그 혀로 무슨 말을 할지를 미리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시 139:4)이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비움과 여백은 성령의 활동공간을 남겨두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아는 "절제의 영성"을 말한다. 언어를 절제하고, 물질 사용을 절제하고, 행동을 절제하고, 소비만이 아니라 생산 활동도 절제하는 영성을 말한다. 현대 인간들은 생명세계 현실을 자기 자신이 기획하고 조정하고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삶의 시공간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한 행동주의 철학에 쇠뇌되어 있는데 여백의 영성은 그 노예상태에서 인간을 구원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여백의 영성"이 말하려는 참 뜻은 성령의 충만을 기다리기 위한 방법론적 전단계로서의 비움이 아니라, 하나님체험에서는 "비움이 곧 충만"이라는 역설적 성경 진리를 다시 회복하고자 함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텅 비움으로 영원히 창조세계를 충만으로 체우시는 은혜로운 신비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워 낮아지심으로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신 만유의 주가 되셨기 때문이다.(빌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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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10
원정
자운영, 베고니아님 환영합니다.
3
542
03-08-10
원정
휴가를 마치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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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9
바람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0
633
N
03-08-09
바람
나를 잃어버린 노래
2
562
N
03-08-09
지구인
입추란다-_-;
6
865
03-08-09
바람
달의 지배
1
543
N
03-08-08
바람
그리움의 날개
1
546
N
03-08-08
웃음
그대가 좋다하면
0
492
03-08-08
바람
모기에 피를 나누어 주면서
4
584
N
03-08-08
바람
아리랑
1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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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8
바람
생명의 기원
0
1,652
N
03-08-08
바람
생명의 기원과 진화
0
637
N
03-08-08
웃음
이곳은..
1
544
03-08-08
바람
다 좋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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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03-08-08
웃음
내가 있어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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