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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8 모모 82

요즘  불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공부를 나름대로 하고 있다.

우선,, 한동안은 홍익학당 윤홍식 님의  화엄경을 들었고,, 요한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몽지 심성일님의  책으로 보는 여러가지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두분다 대단한 분들이다.

지적인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겐 참으로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이중표님의 연기와 관련된 강의를 들었고,,  반야심경이나  금강경과 관련된 강의도 들었다.

또  양자물리학과 관련된 박문호 박사님의 유튜브도 몇개 들여다 보고,,,,

그리고,,  내게는  첫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오쇼와  내 두번째 스승이었던,  선사님의  가르침과 관련해서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다.

그 모두는 내게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체험들을 다시 새로운 시각에서,,,

예전엔  '안다'  했다면  요즘은 '모른다'  라는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그저  비추는 작용인  거울의 역할이라면,,,

나라는게  관계로 이어지는 생명의 활동이라면,,,

그리고  그동안 쌓아놓은 경험이나 감정. 기억이 거울에 비친 대상을 만났을때  일어나는  촉.. 이라는 것이라면,,

그래서 모든것이 연기 돼 있고 연기되는 과정이 삶이고 나라고 하는 거라면,,,


난  대상없이 바라보기는  참으로 오랫동안 해왔었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평화롭고  안정되고,, 그냥 좋아서 습관으로 삼았었고,,

어릴때부터 그 자리는 내게 쉴수 있는 가장 좋은 휴식처였다.

좀 심하게 지루하다 싶을만큼 평화롭고 또 평화로운,,,

그래서 난 그곳에 있는 모든 시간들을 '지루한 평화',,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 지루한 평화 속의 그 시간을 한 30년 이상 보냈던듯 싶은데...

그러다 언젠가부터... 몸의 감각이 자꾸 멀어지는걸 느끼고,,  부엌칼로 뭘 썰다가 내손가락을 썬 일이 두세번 있었다.

그런데 통증도 안느껴지고,,, 썰고 있는 내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는 나를 보고,,,

놀란적이 몇번 있다.

손가락에선 한동안 피도 나지 않아서,,  그 사실이 더 놀라웠고,,

그것을 계기로  난  집안에서 나와,, 사회 활동을 하기로 결심했었다.

그게 30대 초반 쯤의 일이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는,, 휴식할때만 그곳엘 들어가 쉬었기에  예전같은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30대 중반,,

우연히  웃음님이 가지고 있던 책,, 나는 누구인가?  라는 책 제목을 보고,,,한번 명상을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얼마후  학교 주변을 돌면서   나에 대해 부분적인 나를 하나씩 해체해 나가는 과정에서,, 텅빔...안으로 들어가졌었다.

그리고 그동안 오래도록  휴식으로 들어가 쉬던 그 자리가 그거였네.. 하고  알았었다.


요즘 몽지 심성일 님의 유튜브를 보자면,, 그 상태 ,,그자리 밖엔 없다.  라고 열심히 이야기한다.

들어보면 그런가.. 싶은데.. 

그것보다 난 심성일 님의  책을  해설해 주는 방식이 재미있어서  그분의 유튜브를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류의 영화감상도 같이 또다른 시각으로 듣게 되니,, 일석이조라서....


그렇지만, 난,,, 깨달음이나  부처가 되는 거나 돼가는 것이나,,, 그런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 지루한 평화 로움이  그것이라면  거기에 대한 미련이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냥,,잠깐 잠깐,,휴식의 자리일뿐.


난,, 차라리 이중표님의 연기가  좀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내게 생각과 감정은  매우 소중하고,, 

그건 언제나 조건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좋다.

어릴때부터  주변 사람들과  공감을 잘 못하고,,  항상 어느 이상 떨어져서 바라보는 방식으로 오래도록 살아온 탓인지..

난  사람들의 일반적인 감정과 하나되어 울고 웃는 그런 것들이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자리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스스로 변화시켜 나갈수 있는  주체로서의 연기는

아주 멋지다.

주인공으로서의 삶.  

왓칭.. 시크릿. 

최면에서의 잠재의식.


다 같은 맥락으로 내겐 보인다..

난,, 깨달음이 중요하지 않다.

삶에서  주도적이고,, 긍정적이며,,  너도 이익이고 나도 이익인,,,

그런  삶을 살고 싶어  마음공부를 하게 됐던거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거고,,  그리고 참 많은 것들이  삶속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서로가 좋은 방식으로

변화해 왔다.


'언제나 좋게....'


난 그거면  족하다.  

이론이 어떻든,  상식이 어떻든,,

 주변의 사람들과  같이 울고 웃고,, 즐기고 사랑하고,,,

언제부턴가  그 힘들던 공감이   속도는 약간 느리지만,, 그래도 꽤 되는 편이다.

그게 얼마나 기분좋은 느낌인지.... 

예전의 나는 참으로 황량한 대지였다면,  지금의 난,  따뜻한 봄날의 초원과 같다.

꽃도 피고 나비도 날고,,,푸른 풀들로 가득한,,봄날의 작지만 어여쁜 초원.


삶은 계속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이거다. 할만한 나가 없으니... 그냥 '모른다' 로 마음을 열어놓고  그 변화에 순응해 나아갈 거다.

그게 내겐 마음공부다.


좋게..잘 살자.

좋게.. 잘 누리자.


내겐 이게 대승이고 홍익인간이다.

  • 23-12-09 원정
    "예전엔 '안다' 했다면 요즘은 '모른다' 라는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고 있다."
    "삶은 계속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이거다. 할만한 나가 없으니... 그냥 '모른다' 로 마음을 열어놓고 그 변화에 순응해 나아갈 거다. 그게 내겐 마음공부다."
    아주 공감합니다.

    모모님이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 23-12-10 여원
    오직 모를 뿐!!!

    한 소식 했다는 선사들의 ‘오직 모를 뿐!!!’
    요즘에는 이 말이 허황되게 들린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되게 멋진 말이었는데.

    전체에 대한 윤곽
    시작과 끝에 대한 질문에
    맞닥뜨리면 막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광활하고 막막한 미지의 영역에 대해
    ‘오직 모를 뿐!’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그건 제대로 전체를 향해 올라간 자의 함성은 아니다.
    그의 함성은 존재의 시각으로 다가갔다는 반증일 수 있다는 것.

    존재의 시각에서 풀려나
    관계
    상호작용
    연기라는
    일체
    그 경계에 서면
    실감에 대한 앎만이
    생생할 뿐이다.
    왜냐?
    그뿐이므로.
    오직
    그뿐이므로.

    관계
    상호작용
    연기를
    99% 모르다가
    1% 알아졌다해도
    99% 모르는 게 있고
    1% 아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알아버린 것.

    희한하게
    상호작용과 관계와 연기의 영역에서는
    1% 아는 것이
    사실은 전체에 들어와 버린 것과 같으니까.
    소금이 바닷물에 풍덩 던져지면
    던져지는

    바닷물이 되는 것이니까.
  • 23-12-19 원정
    법상스님의 '오직 모를 뿐'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괴롭다’고 해석하지 말고, 그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해 주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경험해 주어 보라.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 괴롭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돈 없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돈 없는 상황을 마땅히 살아주기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 상황으로 인해 괴롭고, 가난하다는 생각 때문에 또 괴로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게 되고, 그렇게 받아들였기에 그 상황이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된다.

    괴롭히지 않고 받아들일 때 그 가난한 상황은 더욱 빠르게 지나간다.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해야할 것도 없으며, 그저 분별하던 것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될 뿐이다.

    무위법이며, 중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처럼 삶 속의 모든 괴로운 일을 만날 때, 그것을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라.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 상황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불이법의 실천이다.

    사실 그것이 나에게 정말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때 분별없이 받아들이라는 말은 곧 ‘모를 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분별하여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말 아는 것이 아니라, 분별해서 아는 것일 뿐, 진실로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십팔계가 화합하여 ‘안다’는 착각, 즉 육식을 일으킨 것일 뿐이다. 그러니 참된 진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를 뿐’이라고 할 때, 육식(六識)이라는 허망한 분별의식이 멈춘다.

    육식이라는 의식이 자신을 주인으로 내세워 ‘나’, ‘내 생각’, ‘내가 안다’고 여기지만, ‘모를 뿐’이라고 하면, 곧장 분별의식이 멈추고, 중도가 실천되어진다.

    그래서 세계 4대 생불이라고 추앙받으며 해외 포교에 매진하셨던 숭산 큰스님께서 그렇게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를 설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적인, 선(禪)적인 중도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 23-12-19 원정
    오직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 / 숭산스님


    말과 단어는 단지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한다.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머리 속으로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오직 모를 뿐'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동양도, 서양도, 한국도, 일본도, 미국도 없다.
    '오직 모를 뿐'은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참선도, 그 어느것도 아니다.
    미국인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셨는데, 왜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 것을 구분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불교조차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모를 뿐'을 가르칠 뿐이다. 알겠느냐?"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
    뼈대는 오직 하나.
    '어떻게 지금 이 순간 중생의 잠을 깨워 이 세상을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이용해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면 된다.
    참선 수행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물론 때때로 이런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내면 속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태어날 때 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을 때 나는 어디로 가느냐이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 물음은 제쳐두고 우리는모든 에너지를 욕심, 분노, 무지를 좇는데 사용한다.
    결국에는 변할 것, 무상한 것들을 좇으며 산다.
    감정과 고통에 집착하고, 어떨 때는 고통을 즐기기까지 한다.
    인간은 영리한 동물이면서도 그들의 전 삶은 고통의 바다를 떠다닌다.
    우리의 업을 지배하지 못하면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죽을 때(몸이 사라질 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죽는 순간 당신의 업은 당신을 어딘가로 끌고 갈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아마 십중팔구 다시 고통의 바다에 태어날 것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참 나'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
  • 23-12-21 모모
    여원님이랑 원정님덕에 정말 공부 잘하게 되네요.

    비쳐지는 그 자리.
    순수의식이라. 하는. 그곳은..
    불교에서 말하는 비로자나불.
    개인안에 소 우주로 축소 시켜 붙인 이름인 아미타불의 자리 이고
    눈인거죠.

    의식. 그자체가 신의 눈 입니다.
    연기는 비로자나불의 법이고
    온갖 비쳐짐은 비로자나불의 성질입니다.

    그러니 내가 본다는 건 첨부터 없는 거지요.
    그리고 이미 완전한 그것일 뿐입니다.

    덕분에 삼위일체가 들어와 졌네요.^^
    비로자나불.= 아미타불=.불자.^^
    기독교 식으론
    성부.= 성령.= 성자.

    저도 이런 문제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감기덕에 소모시킬 에너지도 그다지 없구요.

    그리고

    전 여원님도... 원정님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싶습니다.

    원정님도 원하는대로 공부하시면 되구요.

    상생 한번 들어오려면 컴퓨터를 꼭 켠후 인증 번호를 받아야 하니
    한번 들어와 글쓰는게 제겐 꽤 번거롭네요.
    그래서 자주 글 못남기는건 이해해 주세요.

    대신 올려놓은 글은 즐겁게 읽겠습니다.^^

    두분다 제겐 훌륭한 도반이고 스승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 23-12-22 원정
    그렇지요.
    에고가 본다는 것은 애초에 착각이지요.
    전도몽상이라고 하잖아요.
    애초에 깨달을 것이 없다는 말도 같은 뜻이지요.
    착각에서 벗어나면 그뿐이니까요.
    우리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부처였으니까요.
    착각이라는 사실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체험으로) 확인해 가는 것이 마음공부이고요.
    실제로 확인해 보아야 고통(착각의 결과)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3위일체는 모모님처럼 해석할 수 있지요.
    다른 한편, 3위일체면 어떻고 30위 일체면 또 어떻겠어요?
    의상스님 법성계
    “一卽一切 多卽一(일즉일체 다즉일-하나가 바로 일체이고 일체가 바로 하나로다)
    一微塵中 含十方(일미진중 함시방-티끌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있고)
    一切塵中亦如是(일체진중역여시-일체 모든 티끌마다 또한 역시 그러하다)”
    부분이 생각납니다.
    얼마나 순수의식으로 머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위 착각(전도몽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 같아요.

    제가 좀 까칠하게 굴었어도 이해해 주세요.
    특히 여원님은 많이 섭섭하겠지만 언젠가는 제 마음을 이해하리라 믿고 있어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이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우리는 모두 전도몽상을 체험으로 직접 확인할 것이라고 저는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