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님과 여원님의 글들을 보면서...3

23-12-19 모모 42

원정님의 공(=순수의식. 비침의 자리)도 이해는 되지만,
여원님의 공(=무아.연기)도 전 이해가 됩니다.

제 경우엔  원정님이 말씀하시는 그 공의 자리를 안것이 6.7세쯤 되었을 때 같아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게 된 것은 12세때쯤 이었는데,,
그때의 전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공의 자리를 택했습니다.
생각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부정적인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그 공의 자릴 택했지요.
덕분에 30까지 살아남을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러지 않았다면. 전 분명 자살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지금까지 마음공부로 옮겨갔고,,, 제 삶을 통찰하는 지혜로  지금껏 좋은 결과를 지으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예전엔 오쇼의 강의로 공부를 좀 했었고,
얼마전까진 원정님 인도로,, 대행스님이나,   홍익학당,  
그리고  요즘은   몽지님... 강의를 들으며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원님 덕에  이중표 교수님이나 박문호 박사님의 유튜브로도 공부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 강의들은  두분처럼,  의견이 갈리고 있구요.

사실..제 눈엔
두분의 의견이나,  그  강의들은  특별히 다른건 없어 보여요.

여원님의 경우엔,, 원정님이  바라보고 있는 나.
그 나만 빼고  보라는 얘기지요.
그 자리가 순수의식이며,  비침의 자리란걸  여원님이 모르는것도 아니니...
모르면서 딴지를 거는것도 아니고요.

저역시 원정님처럼  그 나가 항상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원님을 이해하려다 받아들이니,, 아주 쉽게 그 나가  정리가 되어 버렸지요.
물론  원정님이 그걸 모르셔서 하는 말씀은 아닐거라 생각듭니다.
다만,
참나, 보고 있는 나.  도   
주체가 들어있는 나,  라는  여원님 말씀엔 공감합니다.

제 경우엔  원정님이 말씀하시는 그 자리를 다시 한번 명상(그자리에서 깊이 통찰하는것) 해 보았지요.
명상이란게 그런거잖아요.
의문의 덩어리를 크게 증폭시켜놓고,,, 그 자리, 비쳐짐의 귀의처에서  다만 쉬고 있던지..
그럴경우엔  어느 순간 의문의 답이  생각이나 느낌으로 올라올때가 있지요.
그것도 아니면  제 경우엔 꿈으로 답을 줄때도 있구요.

또는 그 비쳐짐의 귀의처에서   깊이 생각을 통찰해서 아는  방식이 있지요.
그 경우  반야라  부른다는건 얼마전에 알았구요.

어쨋든 전  두가지 방식 모두를  잘 사용하는데요.

그렇게 통찰해 본 결과,  
제 바라보는나 도   결국  나  라는 것을 못버린  훈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원님이 말씀하는 연기  에 집중해  명상을 해 보았지요
그리고,,
이중표님의  불교는  가장  석가모니 부처님을  잘 이해한  경전풀이가 아닐까,,, 하는 확신 같은게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몽지님이나 원정님이 말씀하시는  공 .  깨달음을 부정하는건 아닙니다.
마하라쉬의  나는 누구인가?  라는 글이 문제죠.
거기서 진아가 이거다.  라고  딱 선포해 버리는 문제가 생겼으니.. 그걸 누가 부정할까요?

그런데,, 여원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도를 중점으로 이야길 하지요.
그건 힌두교식의  깨달음이지  부처님의 깨달음이 아니라구요.

솔직히 이론적으로 보면  전  너무  부족해서  두분처럼  표현하는데  장애가 많습니다.
다만,,
이중표 교수님도  어릴적 깨달아 오랫동안  공부하신 분인데,,   경험은 제쳐두고 지식으로만 
강의를 하실까요?

전  솔직히 
원정님이나  여원님이  이중표 교수님과  몽지님 강의를  상대편 입장에서 5개 이상은 들어보고
나서  서로  날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두분은 아니라 해도,,  보는 입장에선  서로 팽팽하게  한치도 양보 없는...
물론,  깨달음에 대해선  누구나 그러하지만,, 
그래도 보는 입장에선  좀  무섭네요.  ㅜ,ㅜ

그걸 상대방 입장에서 보고 나서도 그럴지는 알수 없지만,  적어도  이해는 좀 하려하겠지요.

이중표 교수님은 알아듣게 강의를 매우 잘하시죠.
몽지님의  책 읽어주는 것과 관련된 강의는  꽤 들을만 합니다.

그리고 원정님의 공 체험과 관련된 깨달음도 이해는 됩니다.
부처님도 그 비쳐짐의 자리를 귀의처로 삼고  통찰을 말씀하시니까요

제가 통찰을 통해 그곳을 바라보는 시각은  
생명의 바다.  순수의식,  귀의처, 연기 입니다.
그자리에서 모든것들이 시작되고 끝나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파도가 올라오고 내려가지요.
그래서 중심자리이며,  심장 자리가 바로  비쳐짐의 자리라 생각듭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그런줄 알뿐,,,입니다.
파도가 일지 않는 바다는 죽은 바다라지요.
파도를 통해 바다는 산소를 공급받는다고,,, 예전에  들은 얘기가 생각납니다.
몸을 가진 생명들은 모두가  생명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 들입니다.

생각, 감정들은  파도를 파도답게 즐길수 있는 유일한  것들입니다.
없애는 것이  주 가 아니라,
즐길수 있도록  잘못된 관념들을  팔정도를 기본으로 해서, 바르게 바로잡아 
바르게 즐기는 것이   파도를 파도답게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길...이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전 이중표님의  강의를 매우 뜻깊게 봤고,  
여원님의  깨우쳐줌을 고맙게 받아들였지요.

나라는게  실체 없음을 아는게 무아지만,,
그걸  몰라서  원정님이 그러는 것도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파도를 좀더 중점적인 깨달음의 장으로 보느냐?
바다를 좀더 중점적인 깨달음의 장으로 보느냐?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봤자  그 바다에서 나온 그 파도 이겠지만요.

  • 23-12-19 원정
    모모님
    '나'를 빼겠다는 생각으로 '나'가 없어지던가요?
    '뭐뭐할 뿐'으로 살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근본적으로 나가 옅어지던가요?

    제가 모모님에게 여러 번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공'을 우선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공'은 '생각 이전의 자리'로서 '판단이 중지되는 자리'이므로 공에 진정으로 계합되면 판단이 중지되고 당연히 '판단하는 나(에고)'가 옅어집니다.(누군가는 이를 "우리의 자아감각은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다만, 생각의 근원이 드러나면 생각은 빛을 잃는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일을 밝히고 나면 낮에 떠 있는 달과 같이 빛을 잃는다"라고 말하더군요)
    모든 이론은 '공'에 계합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모모님이 '공'에 항상 계합되어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공부가 되고 있음을 아실텐데요.

    이중표 교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분 맞습니다.
    제가 그래서 여원님께 이중표 교수님의 동영상을 소개시켜 드렸지요.
    제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지만....

    여원님에 대하여서는 ...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생각으로 그려내면서 체험한 듯이 말을 하여(에고가 강화되지요)
    그것은 여원님을 위해서도 상생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 보여 그렇게 썼습니다.
    그리고 여원님은 '무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무아에 집착하면, 에고가 강화되지요).
    어떤 견해에도 집착해서는 아니됩니다.
    아마도 많은 시간이 걸릴 듯 싶습니다.
    여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저로서는 여원님에 대한 애정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원님은 지금까지 제가 쓴 댓글들을 꼼꼼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공을 체험해 봐야 합니다.
    그게 여원님을 위해 좋습니다.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공에 항상 계합되어 있느냐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 23-12-20 모모
    네. 말씀 감사합니다.^^
  • 23-12-20 원정
    모모님의 글
    "제 경우엔 원정님이 말씀하시는 그 공의 자리를 안것이 6.7세쯤 되었을 때 같아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게 된 것은 12세때쯤 이었는데,,
    그때의 전 살기 위한 방편으로 그 공의 자리를 택했습니다.
    생각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부정적인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그 공의 자릴 택했지요.
    덕분에 30까지 살아남을수 있었습니다." 부분과 관련하여

    전 모모님이 공을 체험하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위 글 내용과 다른 글 내용이 뭔가 맞지 않아요.
    모모님이 그 자리에 충분히 계합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공에 충분히 계합되면 그 자리의 중요성을 스스로 알게 되고, 안목이 더 열리게 되거든요.
    한 번 점검해 보세요.

    여원님은 머리로 그려낸 공이지 체험한 공이 아니에요.
    그래서 공을 안다는 에고만 더 강화된 것이지요.
    여원님의 공(=무아, 연기) 견해를 여원님이 이해했다고 하여 그게 여원님의 에고를 옅게 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나요? 그걸 이해하였다는 여원님의 에고만 더 강화하고 있을 뿐이지요. 여원님은 글을 쓸 때 조차도 자기를 돌아보지 못한 상태로 글을 쓰잖아요. 자기 감정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데 공을, 무아를, 중도를, 연기를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뭔가 안다는 아상만 공고화된 것이지요. 여원님에게는 지금으로서는 책이 독이 되고 있어요. 먼 세월이 지나면 그 또한 득이 될 수 있겠지만.... 물론 근래에 와서 여원님이 이론적으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어요. 이중표 교수를 만나고 나서... 그런데 그 이중표 교수를 제가 여원님께 소개시켜 주었어요. 제가 그 분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그 분을 여원님께 소개시켜 주었겠어요? 이론을 많이 공부한 스님이 공을 깨닫기 힘드는데, 여원님이 그렇게 되기 쉬워보여 저로서는 안타까워요.

    사실 전 요즘 와서 이런 논쟁성 대화가 싫어졌어요.
    제 공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시간만 빼앗겨서요.
    그런데 모모님과 여원님은 정말로 오래된 도반이기에 외면할 수 없어서 댓글을 달고 하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