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님과 모모님께/空에 대한 무지0

24-03-21 여원남주 59

도반님, 도반님은 공을 체험하고 있는 게 아니라, 행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도반님이라는 자아가 공을 체험하는 거잖아요. 자아를 중심으로 업을 짓는 것을 행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공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행을 발생시키고 있다고 봐야지요.

도반님처럼 자아를 세우고 짓는 모든 업인 행에서 생로병사가 벌어지고, 그로 인한 희로애락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통이 뒤따르는 거예요. 반면 공을 체험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붙잡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해요. 육근이 소멸된 자리라는 그 자리도 존재(자아)이며, 그 자리에 머무는 도반님 또한 존재(자아)잖아요. 없는 것 둘이서 업을 짓고, 행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은 공이 아니랍니다.

공을 체험한다는 것은 자아가 업을 짓는 행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업을 시시각각으로 보면서 보의 실상을 아는 것이에요. 그것을 색즉시공이라고 하는 거죠. 도반님은 도반님의 상태가 참 중요한가 봐요. 주구장창 도반님의 상태만을 설명하니까요. 그게 바로 행이예요. 공이 아니고요. 자아를 중심으로 짓는 업을 행하고 있죠. 도반님이 공을 체험하려면 도반님의 생각을 알아채지 마시고, 생각이 벌이는 업으로 펼쳐지는 행을 단속하세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의 업에 따라 보가 발생되는 거잖아요. 나라는 놈이 이런 생각을 하니 분별이 일어난다. 그러니 분별을 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안해야 된다가 아니라, 이치에 맞는 생각이라는 업으로 나의 삶이라는 보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하시는 게 공을 체험하는 거라고요.

도반님, 공을 체험한다는 것은 발원대로 업을 지으면 그에 걸 맞는 보가 나타난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을 깨달으면 공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空을 돈오한 상태에서 무기공에 빠진 게 아니라, 공이 뭔지를 몰라 행을 공이라고 여길 뿐이라고 봅니다.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이중표》p149∼151업보와 연기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는 업보의 다른 표현이다. 이것을 별역잡아함경(202)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체중생은 모두 유위이며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지하여 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곧 업이다.

지금까지 연기설과 업설은 상호 모순된 사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가 공의 의미를 모호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 인연은 업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은 연기한다’는 말, 즉 ‘일체의 법은 인연에 의하여 나타난다’는 말은 ‘일체의 법은 업에 의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곧 업을 의미한다고 하는 이 경은 업설과 연기설이 동일한 사상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의 몸의 참모습은 업보이며, 업보가 곧 몸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정신이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감정, 이성, 의지, 의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속에 마음이나 정신이라는 영적 존재가 있어서 느끼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찬가지로 느낌과 생각과 의식도 업, 즉 삶의 결과로 나타난 업보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자아로 여기고 있는 오온의 실상은 업보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은 우리의 참모습이 업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즉시색은 어떤 의미일까? 색은 공이기 때문에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며, 같은 말의 반복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공즉시색은 색즉시공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 아니다.

색즉시공, 다시 말해서 오온이 공성이라는 사실은 논리적인 사유의 결과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맛지마 니까야 121. 공성을 설하신 작은 경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성은 차제수행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내용이다. 그리고 공성의 의미는 업보는 있으나 행위자도서의 자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공즉시색은 색 등의 오온은 업의 결과 즉 업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은 형식논리적인 동의어의 반복이 아니라, 각각 다른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다. 색즉시공은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자아로 여기고 있는 것들 속에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공즉시색은 이러한 무아의 깨달음에 의지하여 업을 통해서, 즉 삶을 통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색즉시공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공즉시색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미래의 나’를 성취할 수 있다. 과거의 어리석은 삶의 결과로 현재의 고통스러운 ‘나’가 있을지라도, 그 ‘나’는 공성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통해서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성의 자각은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따라서 공성을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설계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공성을 깨달은 사람들의 발보리심, 즉 부처님의 발원이다. 모든 부처님은 공성의 자각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발심을 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성은 불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