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대제사장 가야바와 예수6

05-03-18 김춘봉 1,213




  소란스러워 밖을 내다보니 떼를 지어 사람들이 몰려왔다. 가야바는 간밤에 안나스 집에서 벌어진 일을 하인을 통해 알고 있는 터라, 느긋한 마음으로 무리 앞에 섰다. 죄인에 대한 심문은 안나스 집에서 이미 끝이 났을 터이고, 자신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수순을 밟아주면 된다.  
  안나스 쪽에서 보내오는 사건에 대해서 가야바는 가타부타 말할 게재가 아니다. 죄질에 따라 형량을 구형하면 된다. 이런 관행에 대해서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간혹 기분 나쁠  때도 있었다. 이번 경우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무리가 끌고 온 죄인은 어제 성전 뜰에서 본 바로 그 젊은이(예수)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가야바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젊은이가 랍비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안나스 법정을 거처 이런 식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발자 중에 검은 외투에 구술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랍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젊은이를 법정에 세울만한 명분을 찾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명분을 찾았다 하더라도 논쟁을 벌려 젊은이를 이길 자신이 없으니 차라리 뒷전에 숨어 무리를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고발 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해댔다. 
“이 자가 성전을 비방했습니다.” 

젊은이가 광야의 패거리라는 소리였다. 

  또 다른 고발 자는 젊은이가 거룩하신 분의 이름을 모독하더라고 했다. 야훼를 함부로 입에 담으면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백성이 있을까? 그래서 야훼를 아도나이(나의 주)라고 불렀다. 젊은이가 그런 것도 구별하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야바는 고발 자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젊은이에게는 죄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하자 그들은 순순히 물러들 갔다.

-당신 말고도 죄를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소. 그들이 안토니요새를 향해 가더라고 했으니 아마도 그런 속셈인 것 같았다. 

  무리가 떠난 다음, 살로메와 빌립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왔던 부인 자우레가 젊은이를 가리키며 갈릴리에서 보았던 설교자가 저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때 가야바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능히 그럴 사람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는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되는 세상, 생명의 텃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 이야기 했다니, 그것은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이념과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내세 따위를 믿지 않았다. 부활 같은 것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현세가 중요하다고 여길 뿐이었다. 
  민족, 집단,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의 전통이며 핵심과제다. 따라서 개인주의에서 비롯되는 영혼이나 부활 같은 것은 이교도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야바는 랍비들이 젊은이를 미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젊은이가 주장하는 생명의 메시지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추구하는 풍요로운 삶은 동일한 어감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랍비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젊은이를 받아들이기 전에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야바 법정을 나와 머뭇거리는 고발 자들에게 안토니요새를 가리키면서 총독 법정에 가라고 부추겼을 것이고, 그곳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에는 안티바 법정을, 또 그곳에서도 거절을 당하자 다시 대제사장 자신에게 보냈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야바는 그들이 두 번째로 왔을 때 무리를 남겨두고 안나스 집으로 달려갔다. 안나스가 판결을 내렸다고는 하나, 오해가 풀리면 사건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야바를 대면한 자리에서 안나스는 화부터 냈다. 
“사마리아인들도 우리의 형제요. 이렇게 말한 자야.” 
여기에 대해서 가야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젊은이 입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고민하는 가야바를 향해  

“이 사람아!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대신해서 죽는다 생각하게.” 
이 말은 안나스의 당연한 발상이기도 하려니와 자신의 죄를 위해 번제 의식을 치르는 백성의 정서에도 맞아떨어지는 소리였다. 여기에 대해서 가야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안나스를 설득하려다 설득을 당한 꼴이 된 가야바가 돌아와 보니 젊은이와 고발 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우레 말로는 무리 중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치더라는 것이었다. 

“총독에게 다시 갑시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갔고, 가야바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  *  -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죄수는 방치해 두는 게 관례다. 흉악범일 경우 까마귀에게 살점이 뜯기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당돌하게도 아리마대 요셉이란 자가 총독을 찾아가 시신을 달라고 청했으며, 총독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청을 들어주었고, 현장까지 따라 간 로마 병사는 두 강도의 다리는 꺾어 사망 확인을 하면서도 유독 젊은이에게는 그와 같은 잔인한 검증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더욱 수상쩍은 것은 요셉이란 자가 시신을 가져가면서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다루더라고 했을 때 가야바는 하인을 보내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이다. 

  사두개파 사람들과 부활론자들 사이에 토론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 온 자를 보여 달라고 몰아붙이면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시체들이 일어난다.’는 대목을 인용하지만, 그 글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경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사야서에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론자들을 향해 새빨간 거짓말쟁이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난을 퍼붓곤 했었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그들이고 보면, 의인 비슷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요셉이란 자가 총독을 찾아가 시신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고, 니고데모란 자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씩이나 가지고 가서 시신에 발랐을 것이다. 그들은 이처럼 요상한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들이었다. 

  젊은이는 예루살렘에 와서 그 많은 여관이나 민박에 들지 못했다. 천막마저도 구할 돈이 없어 감란산에서 노숙하며 지냈다. 그런 젊은이에게 편한 잠자리하나 마련해 주지 않던 자들이 이제 와서 시신을 동굴무덤에 안치하고 고운 세마포로 싸 놓았다고 한다면 수상쩍다 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가사상태의 있던 젊은이가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의당 반가워해야 할 일이지만 부활론자들을 생각한다면 모르는 체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킬 필요를 느꼈으며, 뒤늦나마 요셉과 니고데모의 요상한 짓을 알게 된 회당장 가말리엘이 정신없는 짓을 했다고 노발대발 하는 바람에 그 일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무덤에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덤을 지키던 하인들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을 것이고, 그 와중에서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가야바는 하인들을 꾸짖지 않았다. 시신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무교절 축제기간 중에 생긴 일이라 경황이 없기도 하려니와 부활론자들 기세도 한 풀 꺾였을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  *  -



  이참에, 가야바는 각 집단의 특성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이 윤리적 행위와 의지의 소산이라고 믿는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야훼의 구제가 늦어지는 이유를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죄의 대가가 치러지면 구원의 날이 온다고 주장했다. 광야의 엣세네파 사람들은 이미 구원의 날은 정해졌으며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무리는 대속으로 예수가 죽었으니, 그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룬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써먹었다.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젊은이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가야바는 젊은이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젊은이는 생명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을 통해 풍요로운 세상이 온다고 확신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무한한 생명력을 믿고 쓰라고 가르치는 가운데 현실을 부정하는 자들을 향해 비난 성 발언을 퍼부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랍비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젊은이는 사람을 이끌되 내세 따위를 설정하지 않고 현실 문제를 통해 가르치려 했으며, 별안간에 모두 의인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윤리나 도덕을 강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의 욕구를 무조건 거부하는 독단도 없었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길을 찾아 순순히 걸어가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는 종교적 교리를 가르친 율법사가 아니다. 그는 어느 집단이나 특정의 신에게 예속된 사람도 아니다. 그는 모든 종교에 대항하면서도 그 속에 귀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자 가야바는 회한의 벅찬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예루살렘 이야기, 총독 빌라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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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5-03-18 원정
    "칼리굴라 황제를 제외하고, 대부분 로마 위정자들은 신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무대에 오른 배우가 극적효과를 노리면서 사용하는 대사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통치 수단으로 거론할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도 그 조직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 05-03-19 김춘봉
    저는 예수와 자칭 제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차별화를 시도하려다 보니, 예루살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고요?
    서기 50년대부터 바울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야고보서를 썼다고 합니다.
    64년경에 가서는 마가복음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누가복음, 마태복음, 히브리서, 유다서, 사도행전, 빌립보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베드로전후서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80년대에 가서는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이 등장했으니 그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의당 서기 70년 유월절 예루살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종말론적 이야기는 풍성하나, 해법을 찾을 방도가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뿐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사상자 1,100,000명, 포로로 잡힌 자 97,000명, 아르테스의 좁은 골자기로 도망친 자가 3,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재에 해당하는 대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기 79년 8월 베스비오 화산 폭발 당시 도시 전체는 화산재로 1m 가까이 매몰되면서 1500년 동안이나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뒤늦게 발굴되면서, 화산 폭발에 따르는 재앙을 사전에 피해 볼 요량으로 연구를 시작합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물고기는 물 밖으로 뛰어나오고, 뱀은 구멍을 떠난다고 하더군요. 인간에게는 그만한 능력마저 없다고 여긴 나머지 물고기나 뱀을 관찰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물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참으로 그럴까요?
    혹시, 신 타령 하는 자들의 최면에 걸려 무능해진 것은 아닐까요?
    예루살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다윗왕 이후, 그곳에서는 36번의 정복과 10번의 멸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지금도 분쟁의 핵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생존권 문제라고는 하나, 십자군 원정이 그러했듯이 신 타령을 하는 자들에 의하여 그리 되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원정님!
    제가 예루살렘 이야기를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미물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그 길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감히, 신 문제를 ‘무대에 오른 배우가 극적 효과를 노리면서 사용하는 대사’ 정도로 비유하게 되었습니다.

  • 05-03-19 원정
    그래요.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부시가 신의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모습이나 중세 교황청에서 신의 이름으로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것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런 모습을 예수님이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 05-04-23 김춘봉


    원정 (2005-04-12 10:44:03)

    ‘참된 실재는 원자와 공허뿐이다. 원자는 궁극적 실체이고 공허는 원자가 운동하는 장소에 해당하기 때문에 원자 상호간의 충돌에 의하여 세상이 만들어졌다.’ 는 에피쿠로스의 학설 잘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에피쿠로스라는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이 없군요.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고, 신은 단지 유기체의 야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김춘봉 (2005-04-14 02:03:48)

    ‘다윗에 의하여 힘의 논리로 세상을 어찌해볼 수 있다는 가상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다음이고 보니, 메시아꾼들은 자신들에게 걸맞은 상징적 인물이 필요했다.
    때마침, 젊은이는 세인의 주목을 받는 처지라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으며, 그를 볼모로 로마인들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선전하려는 자들에 의하여 반로마 성향이 부추겨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유피테르 신상 건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고 말았다. ‘
    이 글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또 다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게 되겠지요.
    원정님,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 05-04-23 바람
    예루살렘이 그렇게 멸망하게 된 것, 그것도 깊이 보면 하늘의 뜻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 또한 있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다 깨닫고 그 모든 섭리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으면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눈으로 보여지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그러한 로마를 통하여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려는 하늘의 섭리를 발견하였더라면,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 되니, 보다 나은 어떤 길이 열렸을지도 모를일이라고 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르는 자는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이 말씀 그대로라고 보는 것이지요.
  • 05-04-23 김춘봉

    바람님께서 ‘예루살렘이 … 그렇게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 또한 있었다고 봅니다.’ 하신 견해에 공감합니다.
    저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다 깨닫고 … 로마를 통하여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려는 하늘의 섭리를 발견하였더라면 … 보다 나은 어떤 길이 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신 결론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바울이나 베드로를 주인공으로 삼았더라면 바람님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글 속의 등장인물은 총독 빌라도, 대제사장 가야바,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이고 보니, 유대교 본래의 모습은 비폭력 신앙이 전부였으며 왕들의 출현 특히 다윗에 의하여 야훼가 전쟁을 좋아하는 신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속적 후원자로 상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대책 없이 로마와 일전을 벌릴 생각을 했으며, 끝내 멸망을 자초한 꼴이 되고 만 것이랍니다.
    이를 두고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북한에서는 핵을 가지고 미국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서방세력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이나 다니엘서를 보십시오.
    2천년 전에도 핵무기에 버금가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면 … ’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티투스 장군과 일전을 벌릴 생각을 했던 것이랍니다.

    30년대 이야기 ‘총독 빌라도’ 에 이어
    40년대 이야기 ‘유대 왕 아그립바’ 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60년대 이야기 ‘예루살렘 최후의 날’ 골자를 미리 말씀드린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람님, 고맙습니다.
  • 05-05-08 바람 일치에 대하여0865
    05-05-06 바람 지혜와 순결0889
    05-05-05 바람 사랑에 대하여1862
    05-05-02 바람 판단과 이해에 대하여0881
    05-04-29 바람 영원에 대하여1942
    05-04-28 바람 앎과 모름에 대하여1921
    05-04-22 바람 견성에 대하여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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