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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바라보기와의 만남>
1
05-12-24
원정
1,105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바라보기와의 만남>
name : 지나다가 수정 삭제
지난 글에 이어서 쓴다.
내가 '내 자신의 존재'를 최초로 의식(생각)한 것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다. 당시 난 어머니와 무슨 이유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른 또래의 아이들이 집에 오면 엄마부터 찾던 나이에 아무데서도 어머니가 보이질 않자 어느 날 문득 서서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하고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간단한(?) 의문, 난 그땐 몰랐지만 그 후 내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곳에서 모든 인생들이 이 의문을 가슴속에 깊이 끌어안고 표류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내 어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난 '우주에 홀로 남았다'는 느낌으로 두 번째로 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식하게 되었다. 최초의 의식은 단 한번으로 스쳐 지났지만, 이 두 번째는 날 혹독히 훈련 시켰다.
어머니 돌아가신 뒤 1년 정도 후, 어쩌다 먹은 것이 체한 게 근 20년 이상을 괴롭히며 나를 우울증, 무력증으로 단련시킨 것,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자 기쁨은 몇 일, 도대체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가 태어난 정말 목적이 무언지 등등 남들은 쉽게 지나치는 문제를 왜 그리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게 되었는지, 철학사나 문학사에서 내가 왜 운명론이나 결정론, 또는 염세주의나 객관주의에 쏠리게되고 그런 쪽을 선호하게 되었는지, 등등 이런 것들이 혹독한 훈련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성향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습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반항보다는 수용하는 태도로 일관해온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린 나이(고교시절)에 나에게 불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늘 그 입장에서 이해하는 습관이 생겼다. 저 사람은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며 이러저러해서 저렇게 나한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니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의식수준(에너지 상태)이 가장 낮은 상태의 사람이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분노는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분노하는 것이 나에게 불리하다고 느껴졌을 때, 나의 뇌는 포용(이해)이라는 방편으로 무너지는 나의 마음을 보호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생각이다...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에 납득이 안가는 것이 없었다.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타당한 일들 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가치 판단 완전 빵점의 상태.
'너는 임마 이런 점이 잘못이야. 니가 이러니까 내가 안 그럴 수가 있냐? 너 왜 그래? 너 때문 이잖어.'
나에게는 그런 용어가 비현실적이었다.
'그래 니가 그럴 수 있지. 내가 그래서 니가 그랬구나. 알만해. 이해가 간다. 하기야...'
대학 때 내 별명이 '허기야('하기야'를 난 '허기야'로 발음했다)'였다. 단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불렸지만. 바로 내 애인. 대화 중에 내가 가장 자주 쓰는 용어라 난 그렇게 불렸다.
어쨌든, 내가 대면해 오는 세상을 향해 대처한 방식은 '이해'였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능했다. 속담이 있다. 공동묘지에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고. 이해는 글자 그대로라면(또는 이성적으로) 무언가 타당하고, 그래서 마음속에 합당한 것으로 수용되는 것인 것처럼 얼핏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해는 정서적일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생각(마음)은 아마 100 % 일지도 모른다고 판단(느껴진다)된다. 산수(1+1=2, 2-1=1)는 빼놓고.
만약 내 추측이 맞는다면(확신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진리는 정서수준의 차이 이고, 의식수준도 정서수준의 차이 일 뿐이다. 의식수준의 최고치가 깨달음을 의미한다면 따라서 깨달음도 어떤 상태의 정서수준에 다름 아니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차이는 나중에 마음을 닦아나가면서 깨달음을 판단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만약 깨달음이 정서수준의 차이일 뿐 어떤 능력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통 사람의 정도를 뛰어 넘는 어떤 특수한 능력이라도, 또 그런 것을 추구하는 어떤 수련법이라도, 또 그런 상태가 높은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어떤 사람의 주장이라도, 그것은 진정 깊은 깨달음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높은 정서수준이 되면 거기에 상응하는 초능력이 당연히 나타나는 것 아니냐?' 라고 반론이 떠오를지 모른다. 역으로, 가지고 있던 그런 초능력이 홀연히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안한 마음 상태, 애초에 그런 초능력이 전혀 나의 깊은 평안과는 관계없다는 확신이 들고 조금이라도 부럽지 않은 상태, 그래서 애초부터 아예 추구하려는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상태, 그런 것들이 진정 자유스런 깊은 깨달음의 상태와 관련 있지 않을까.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각설하고...도대체 뭔가 머리로 판단하게 되면 반드시 반론을 일으킨다(내 마음이 위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 주기 바란다).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마음의 언덕이다. 기분이 좋든 짜증이 나든 내가 의지하고 나의 정서를 숨김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유일한 대상이다. 정서적으로 사람은 모태의 양수 속에서 편안히 헤엄치고 놀다가 이 세상으로 던져지면 그 분리된 충격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을 때까지 어머니가 옆에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는데, 나처럼 약간 빨리 헤어지면 같은 정도의 세상의 파도라도 좀 어렵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그렇다고 비이상적인 상태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런 환경으로 만들어 놓을 것 같다. 고(苦)는 사람을 단련시킨다.
대학에 합격하고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 진 몇 일 후, 난 극심한 공허감에 시달렸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일을 이루었다는 기쁨의 날은 불과 몇 일, 입시공부를 하면서도 간간이 떠오르던,
'내가 할 일은 지금 이런 일이 아닌데', '무언가 내가 할 일이 있는데 그걸 찾지 못하고 지금 이 일에 매달리고 있지', '이것만 끝나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싶은 일이 무언지 그걸 찾아야지'
하던 생각들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를 휩싸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며, 내가 태어난 순수한 목적이 무엇이냐는 궁금함, 나아가 짓누르는 답답함으로, 또 그동안 급한 일(입시공부) 때문이었는지 무심코 지나쳐 왔던 '우주에 홀로 남았다'는 그 외로움을 밑바탕에 깔고있는, 극도의 공허감으로 한꺼번에 밀려왔던 것이다.
나는 이런 궁극적인 궁금함과 공허감이 유발하는 부자유의 해결을 먼저 기독교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 위대한 성자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기쁜 소리)이고, 나 같은 일개인이 그것의 진위여부를 가리기에 앞서 수많은 인류가 믿어왔던 진리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는, 나보다 뛰어난 역사상 무수한 지성들이 믿고 있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거슬러 저 최초에 전지전능한 신(神)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는 그 신은 도대체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궁금함이었다.
그냥 스스로 존재한다고?
이러한 논리는 아무래도 나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사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논리의 문제가 아니고 정서의 문제이다).
그런 와중에 데카르트를 만났다. 그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눈앞에 보이는 우주가 실제로 존재해서 내 앞에 보이는 것인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인지 고민하였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깨고 나면 모두가 허상이듯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도 모두가 깨고 나면 사라지는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인 것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나 역시 그 문제를 생각하느라 다른 일엔 정열적인 흥미가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희망을 품고 목표를 정하는 일, 같이 더불어 이렇게 살고 있는 이런 일들이, 깨어나면 모두가 허상일지도 모르는 이 현실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이 현실에서, 종교는 무엇이고 가치는 무엇이며 문화·예술행위는 무엇 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부정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라는 것.
그래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명제만큼은 분명히 절대적인 것으로서, 꿈일 수가 없는 실재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혹시, 전지전능(완전한)한 신의 존재를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전한(절대적인) 신이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는 것이므로,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
라는 이 명제를 참(진리)으로 받아들이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한동안 이 생각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까지는 참이지만, 불완전한 인간을 설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신을 유출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되었다. 결국 신은 논리로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믿음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믿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절대 진리를 믿음(정서)에 의해서 확인한다는 것에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후 나는 그토록 원하는 절대 진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과학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를 밝히는 것은 가능하지만 천국과 지옥의 유무를 밝힐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고, 철학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여 왔지만 끝없이 물음만 있지 답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생각 하에,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낸 상황논리일 뿐 어떤 절대적인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 하에, 또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 이외에는 어떤 것도 옳고 그르다 분별할 수 없다는 생각 하에, 아무 판단 없이 그냥 사물을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그냥 판단 없이 바라만 본다는 것, 다시 말하면 세상을 나의 주관이 아닌 객관화된 상태로 인식한다는 것, 이것은 문학사에서 현대(근대인가?)조류에 속하는 누보로망의 소설 속에서 표현되는 인식론중의 하나이다(전문가가 아니니까 틀리더라도 그런 대로 보아주었으면 한다. 내 감정상태 이외엔 사실 내가(어느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주장하는 모든 것은 항상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당시 나에게 각인된 누보로망이 지향하는 특징 중 하나는 소설을 쓰되 아무런 주제도 없고 선악이나 미추의 판단도 유보한 채,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사진을 찍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묘사한다는 것이었다. 왜냐? 이미 판단을 하면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되고 마니까. 나는 여러 문학사조에서 누보로망의 이러한 경향에 경사 되었다.
철학사에서도 나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와 실용주의, 실존주의 등을 대하면서도 이중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추출하여 스스로 결론 내리길, 나란 존재란 부모로부터 타고난 선천적인 요소와 태어난 이후 경험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후천적인 요소로 구성된 생각하는 존재로서, 모든 것이 인과에 의해 진행되어가고 있는 이 우주에서 나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아무데도 없다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즉 세상을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진정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흘러가는 강물에 던져져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가는 한 방울의 물에 비유할 수 있는 나란 존재가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울러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또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인과의 흐름 속에 한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 뿐, 내가 지금 생각하고있는 무엇이든지 그것까지도 이미 그렇게 생각되도록 결정되어졌다는, 설사 신이 있더라도 신의 의지조차도 나의 인생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철저한 결정론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태어난 이유, 목적, 가고있는 방향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으로, 그리하여 세상을 사진처럼 무심히 바라보게 되면서,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분노도 슬픔도 즐거움도 기쁨도 점점 사라지면서 나는 마치 머리만 남은 사람처럼 마음이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알았고, 아울러 삶에 대한 의욕도 점점 사라져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겨우 겨우 일을 처리해 나가는 비생산적인 삶을 지속하게 되었다.
흥미 있는 것은 외로움과 공허감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본 것은 나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공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내면의 자기방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우습게도, 나의 삶의 의욕까지도 같이 사라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나는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고 나의 논리체계에서는 내가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하등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직은 현재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 죽더라도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의 에너지(욕망)가 점점 빠져나가면서 나중에는 죽음이 가장 편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책을 보아도 삶에 의욕이 나질 않았다. 누가 아무리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을 이야기해도 나에게는 우이독경이었다. 아무리 그런 글들을 보아도 내 마음은 그렇게 되질 않는데...
당시 내 마음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의식이 들자마자 그냥 이대로 편안히 죽음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가장 순수한 내 욕망이었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성욕, 오로지 그것만이 내가 삶 속에서 느끼는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유일한 욕망(에너지)이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순수한 욕망 두 가지는, 하나는 에너지의 완전 소멸(영혼까지도 완전히 이 우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면 난 그걸 택하고 싶었다)을 원하는 죽음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성욕이었다. 그것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생존 본능을 제외하면 내가 원하는, 이 삶에서의 진정 순수한 욕망(에너지의 활성을 위한)은 오로지 성욕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에게 늘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인생에서 내가 이 성욕과 같이, 순수하고 간절하게 원하는 목적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목적이 있다면 과연 내가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가능성은 없었고, 나는 삶에 손톱만큼의 의욕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앞으로 어떤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쓰다보니 이야기가 자꾸 길어지는 것 같아 좀 미안한 마음이 일어난다. 처음 생각은 모든 것을 한번에 간단히 써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전달이 제대로 될까하는 노파심에 길어지고 있다.
아무튼 이런 배경을 가져서 그랬는지 나는 이로부터 몇 년 후 처음으로 라즈니쉬의
'자신을 들여다 보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
라는 글을 읽었을 때, 이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콜럼부스의 계란과도 같은 발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나의 외부에 펼쳐져 있는 바깥의 세계에서만 진리를 찾으려고 애썼지,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발상은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미미하게 내부의 내 마음을 변화시켰고, 언제부턴가는 내가 순수하게 원했던 성욕과 마찬가지로, 내가 삶을 통해서 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순수한 욕망으로,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적 그 자체로 다가왔다.
다음에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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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17
마음
오매 오매 이토록 눈에 잘 들어오는 글일까요? 때론 허무에 빠지고 때론 공허에 때론 죽음과 때론 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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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4
원정
생각¨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바라보기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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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4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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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성(性)이 수행의 도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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