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생각하고 있는 자 바라보기>1

05-12-24 원정 1,150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생각하고 있는 자 바라보기>

   name : 지나다가 수정   삭제  


지난 글에 이어서 쓴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다. 새벽에 눈을 떠 죽음을 상상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의욕(에너지)이 없는 상태. 이대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아무런 욕심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야말로 백지상태. 오로지 순수하게 편안한 죽음만이 소망인 상태.

혹시 오해할 지 몰라 조금 더 부연하면, 이렇다고 늘 24시간 허무주의에 빠져 남들이 보기에도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시들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죽고싶다는 기분도 종일 그랬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객관주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허무나 염세조차도 객관화 해버렸다고나 해야 할까.

그 당시(대학 4년)에 나에겐 어느 때 보다도 가장 편안한 삶이 주어져 있었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 없었고 졸업하면 군 입대를 남겨두었기 때문에 직장 걱정도 없었으며 친구들이 부탁하는 미팅이나 대신 메꾸어 주는, 태어난 이후 가장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마음도 상당히, 지금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 태어난 이후로 가장 편안한 상태로 기억된다(어쩌면 이것은 삶의 여건이 편안해진 이유가 크겠지만, 당시 나는 이런 좋고 나쁘고 등등의 개념자체가 극히 희미했던 것 같기도 하다) . 세상이 의미가 없고 무엇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죽음 자체도 나에겐 막연하나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세상을 비관해서 생각한 죽음도 아니고, 삶이 힘들고 어려워서 생각한 죽음도 아니었으며, 그냥 그것이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상태로 막연히 느껴졌을 뿐이다.

오히려 죽음은 나에게 이 삶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삶이 고통스럽다면 그걸 버티기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고 그럴 때 죽음은, 아무 때고 이 삶이 힘들면 버리고 갈, 막연한 피난처로 느껴졌다고 지금 기억된다. 그러나 어쨌든 뚜렷한 이유 없이 삶의 의욕이 없는 그것자체는 정말이지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라즈니쉬를 만났을 때에는 생활도 안정이 되고 외로움, 공허감, 죽음의 그림자 등이 거의 사라져 문득 '이제는 과거의 그런 마음들에서 벗어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들도 이젠 아주 가끔 머리를 스쳤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학생 때 내가 그런 경향이 있었다는 정도로,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생각으로 사춘기 보내지 않느냐 하는, 술안주 감으로 이야기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세속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욕심도 거의 채워져 대체로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

웃기도 하고, 화도 낼 줄 알고, TV를 보며 가끔 눈물도 글썽이는, 그렇게 지극히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아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 생활의 안정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대체로 삶에 만족하였다.

그럴 때 라즈니쉬는 나의 잠자는 영혼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아... 그런 생각을 깊이 밀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런데 해결할 방법이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라고?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참 탁월한 발상이었다. 세상의 어느 무엇을 아무리 평생을 연구해도 내가 갇혀있는 듯한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 방법은 좀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내게 가져다 줄 지는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지 않느냐고, 즉 다른 모든 방법은 실패가 확실한 것들이었지만, 이 것은 아직 실패가 확인되지 않은 내가 만난 유일한 방법이었다.

몇 달 동안 난 열심히 자신을 들여다보았지만 별 일도 없었고, 또 별 기대도 없었다. 어느 날인가 술을 좀 먹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훵~ 하니 공허해서 집에 제대로 못 들어가고 집 주변 공원 호수 가를 헤매다가 새벽 4시가 넘어 집에 간 것이 기억난다(혹시 겉도는 여자가 어디라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난 그때 결혼해 있었다). 전에 없이 극심한 공허감이 밀려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자신을 들여다보자 '심층깊이 잠자던 공허감이 밑바탕부터 다시 끌어올려진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면서 과거를 기억하다 떠오른 생각이다. 당시엔 그것이 그냥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적 삶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혼자 술을 한잔 먹다가 나의 가슴을 들여다보았을 때, 놀라고 말았다. 이게 웬일이지?

'가슴에 은은하게 평화가 가득 차 있었다.'

난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뭘까? 이게 무슨 느낌이란 말인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평화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경험한 최초의 성장했다는 느낌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지식은 쌓이고 정보는 늘었더라도 나는 성장한다는 느낌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건 좀 달랐다. 무언가 내가 달라져 있었다. 그 동안 특별히 해 온 일이란? 다른 것은 없었다. 있다면 바라보기 밖에는.

'바라보기가 이게 효과가 있는 거 아냐?'

그때부터 바라보기를 신뢰하게 되었다(그 전엔 정말 바라보기, 별 기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지).

마음에 깃 든 평화로 인하여 나는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다. 우주 공간이 깜깜한 그리고 공허한 빈 공간일 것이란 생각에서 평화로 가득 찬 공간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평화로 가득 차게 느껴졌다.

그리고 난 알게 되었다. 철학사에서 왜 석학들이 같은 세상을 보면서 이성론을 주장하고 경험론을 주장하고 실용주의를 주창하게 되는 것인지를. 왜 그토록 내가 유달리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에 그렇게 마음이 끌렸는가를.

동일한 세상이, 개개인이 가진 자신의 정서 상태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판단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내가 바라본 것은 주로 가슴의 마음이었다. 라즈니쉬가 소개한 바라보기 명상법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었다. 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멈추다가 자신을 바라보기, 달리기를 하다가 도저히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그 마지막 순간을 바라보기, 섹스 중 오르가즘에 도달했을 때 그 오르가즘의 순간을 바라보기 등등. 지금 기억에 [명상비법(?)]이란 책이었는데 100 여가지가 넘었지만 공통점은 극한 상황에서 바라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무언가 끊지 못하는 욕망이 있을 때, 예컨대 담배 같은 걸 끊고 싶을 때 억지로 욕망을 참지 말고 피우며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것 자체가 삶을 좀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살아가면서 해서는 안되겠는데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욕망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그럴 때 바라보기를 해 온 것이, 그 당시는 몰랐어도 몇 개월 후 또는 몇 년 후에,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을 강화시켜 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바라보기를 했던 과거를 기억하면서 지금 떠오르는 게 있다. 생각은 무척 여기에 빠져 있었는데 실제로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을 합산한다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바라보기'보다는 '바라보기를 생각'하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그 이성에 대해서 유독 생각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쯤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을 하루 합산한 다면? 몇 분이나 될까? 많아야 2-3분 이내가 아닐까 싶다. 계속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이건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는 건 바라보기를 하다가 언제 잊어버린지도 모른 채 잊고 있다가 다시 바라보기가 생각나 바라보게 될 때 '아! 내가 아까 바라보다가 잊어버렸구나'라고 알게 되는데, 이런걸 알게되는 것도 완전히 가물에 콩 나기인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는 상태로 죽는 경우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그 평화를 느낀 이후 다시는 외롭다거나 공허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고속버스를 편안히 타고 다닌 것이 아마 그때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그렇게 바라보기를 하고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하다라고 생각될 때쯤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서로 말을 놓았는데 이 친구 한참 무언가에 대해 논쟁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게 네 입이 말하고 있는 거야? 만약 입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뭐가 말하고 있는 거 같아?'

'네가 지금 나를 보고 있는데, 그 보고 있는 게 네 눈이 보고 있는 거야? 만약 눈이 보고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면 뭐가 보고 있는 거 같아?'

'그거 지금 바로 말해 봐. 뭐라고 생각해?'

난 잠깐 생각해 보다가 순간 당황해 버렸다. '이거, 무슨 얘기 하고있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쪼금 더 생각해 보았다. '이걸 공(空)이라고 하나?' 내가 끙끙대고 있자 그 친구 다시 말했다.

'집에 가서 더 생각해 보고 알겠으면 다시 와 봐. 그러구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 날 완전히 충격이었다. 바라보기가 콜럼부스의 계란이라면, 이건 생각에 폭탄 맞은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 태풍도 그런 태풍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토록 전체적으로 집중해서 뭔가에 휩싸여 본적이 없다. 그 날 이후 2-3일 정도 온 종일 그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다. 꿈속에서도 문득 그걸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그 발상에 놀랐다. 그 동안 '자신을 바라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가슴, 즉 마음을 보았었다. 마음의 느낌을 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 즉 내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데카르트를 떠올렸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는 생각한다.'가 생각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다니... 그런 발상이 있었다니...!!!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이 궁금함이 풀리지 않는다면...(정말 대책 없었다) 난 무지하게 궁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아침이면 때때로 출근 전 시간이 남을 때 뒷짐을 지고 방구석을 왔다 갔다 하며 '이게 무어지?'하며 골똘히 생각했다. 전철 안에서, 가끔은 식사하면서, 어떤 땐 대화 중에도...

그러나 지금 생각나는데...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해서 생각하고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실제 시간을 합산한다면?

뒷짐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이게 무엇이지? 하고 궁금해 할 때(혹은 바라볼 때?) 그때도 그러나, 걸으면서 바라보기가 아니라 딴 생각(잡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발견은, 다시 바라보자는 생각이 떠오르며 바라보기를 시작하게 될 때, 그 때 '아...그동안 내가 잊어먹고 있었구나'라고 생각이 떠오르며 그 순간에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끊어지지 않고 계속 바라보고 있던 시간은 몇 초나 되었을까? 길어봐야 10초나 될까... 모르겠다. 언제 잊어버렸는지 그 순간을 모르는데 알 수가 있나. 어쨌든 순식간에 잡념이 들어와 바라보기를 잊어버리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늘 자신을 망각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것(바라본다는 것)을 모르면 평생 망각 속에 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런 건 고사하고(혹은 그런 궁금함을 가슴에 깊이 품고서는)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화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게으름 피우며 또는 바쁘게 허덕거리고, 혹은 어딘가에 떠밀리듯이 살다가 죽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하철에서 희미하게 떠오른 생각 하나.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것, 이것은 저 다른 사람들이나 나나 똑 같은 것 아닐까? 개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은 모두가 같은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지금 나처럼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을 해 보니, 나의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대부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이렇게 앉아 있다는 건데? 머릿속은 아마도 복잡하게 쉬지 않고 무언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좀 묘한 기분이었다. 깊은 내면에서는 모두가 하나인데, 지금 이렇게 다른 모습들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슨 일들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또 하나, 이 바라보고 있는 이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똑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어려서나, 성장해서나, 지금 이 자리에서나,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모든 모습이 변했어도, 겉모습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마음이 그렇게 변화 무쌍하게 변해왔어도, 이 바라보고 있는 이것은 언제나 변함 없이 같은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들은것이다.

그 친구를 찾았다. 내가 느낀 것들을 말했다. 그것이(궁금해 하고 있는 그것, 바라보고 있는 그것)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친구 낄낄~ 거리며 간단히 말했다.

"더 해봐. 택두 없이 멀었어.' '그리고 내가 지금 말해 줘두 소용없어.'

다음에 이어서 쓴다.


  • 06-12-18 마음
    다음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