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나는 누구인가?)2

05-12-24 원정 1,177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나는 누구인가?)

   name : 지나다가 수정   삭제  


지난 글에 이어서 쓴다.

그 친구는 사실 불교계 어느 원로스님의 상좌였다. 당시 머리를 기르고 평범히 살고 있었는데 아주 어려서 출가했었다 한다.

그가 나에게 질문했던 것은 '이 무엇고(이 뭣고)?'라는, 불교 선종에서 수행 방법으로 삼고있는 화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몇 년 뒤에 알았다. 내 몸을 움직이고 끌고 다니는 이 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는 불교를 모르면서 우리나라 선종의 화두선(간화선)을 그렇게 맹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화두, '이 무엇고?'를 내가 <생각하는 자 바라보기>로 제목 붙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엄연히 '이 무엇고?'는 화두선 이고 '바라보기'는 위파사나 이다.

위파사나의 네 가지 염처(사념처)는 몸 바라보기, 느낌 바라보기, 마음 바라보기, 법 바라보기이다. 나는 처음 '자신을 바라보라 거기에 진리가 있다'라는 글을 읽고선 이 중에서 마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 다음, 보고 있고 말하고 있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질문 받았을 때는 '의식'에 대하여 궁금함을 가지게 되었다. 의식을 바라본다는 것이 사념처 중 '마음 바라보기'에 해당될 지 '법 바라보기'에 해당될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하튼 궁금함을 가진다는 것은 그 의식을 집중적으로 궁금해하며 동시에, 그것(의식)을 '바라보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먼저 글의 제목을 <생각하는 자 바라보기>로 정한 이유이다.

화두의 '이 무엇고?'와 위파사나의 '바라보기'의 다른 점은 위파사나가 그냥 편하게 바라보는 것이라면 화두는 집중적으로 골똘히 이것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가지는 것인데, 이로서 화두를 '집중적인 맹렬한 바라보기'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불교계에서 이런 말 했다간 아마 무식한 사람 취급하겠지만, 단순히 그저 내가 혼자 경험적으로 그런 요소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 정도로만(사실 바라보기를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써지고 있다)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엄연히 화두선과 위파사나는 다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상한 듣도 보도 못한 물건이 있어서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게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 물건을 궁금해하며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그 물건에 대하여 머릿속으로 골똘히 생각한다고 해보자.

이 역시 그 물건을 머릿속으로 골똘히 생각하며(궁금해하며) '바라보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지각에는 '바라보기'가 빠질 수 없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모든 의식이 눈으로 보다, 귀로 들어 보다. 코로 냄새 맡아 보다, 혀로 맛을 보다, 몸(촉각)으로 느껴 보다, 생각해 보다라는 '본다'는 개념이 들어있다. 우리의 의식은 모두 보는 행위를 근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의식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역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처음에 주로 마음을 들여다보는(바라보는) 행위를 해오다가(그것 밖에는 상상을 못했으므로) 그 친구의 질문을 듣고 의식을 들여다보게(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의식을 '궁금해하는 것'과 그냥 '바라보는 것'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는데 결과적으로도 어떤 차이로 나타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궁금했던 적이 간간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간화선은 '바라보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지극히 효과적인 방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간화선 만이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최상승법으로 알고 있는 스님들(요즘에는 불교계에도 위파사나가 유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결과적으로 동일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생각하는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면 그게 뭔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누구나 마음속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자신이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일으켜주면 관심이 쏠리게 된다.

화두는 바로 궁금함을 일으켜서 자신을 집중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방편인 셈이다.

활구(살아있는 화두)와 사구(죽은 화두, 효과 없는 화두)의 차이는 궁금함의 있고 없음에 있다. 만약 누가 화두를 받았는데 거기에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화두는 그 사람에게는 죽은 화두인 것이다.

'이 무엇고?'를 한 3-4년 정도 열심히 하고 다니던 어느 날 아침 창 밖을 내다보며 무심코 서 있다가, 갑자기 머리가 환해지며 가슴이 시원함을 느꼈다. 한 생각이 느닷없이 떠오른 것이다.

'네가 태어난 목적? 그런건 없어. 너는 어디서도 오지 않았어. 늘 여기 이렇게 있었지. 그리고 어디로도 가지 않아.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너의 목적이야.'

이 날이 내가, 인생에서 두 번째로 크게 성장했다는 걸 느낀 날 이다. 나는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날의 태양은 그리도 밝았고,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은 정말로 아름답고 포근하였다.

그 날 나에게 불연 듯 떠오른 생각은 어느 책에서인가 보았던 것일 것이다. 불가에서는 흔히 그렇게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그런 이야기들이 실감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냥 지나쳐 버린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내게 다가온 그 생각은 너무도 확실한 것으로 마음에 각인되었다. 떠오른 생각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 한번 과거와 크게 다른 정서상태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지금까지의 궤적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 버렸다.

그토록 궁금하게 여겨왔던, 내가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런 것들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난 그 의문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 삶에서의 너의 목적? 그런 게 있다면 네가 이 자리에서 설정하면 그것이 바로 너의 목적이 될 뿐이야.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그런 이유(목적) 같은 건 없어. 그냥 인연 따라 넌 이 자리에 있을 뿐이지...'

그제 서야 현실이 중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삶에서 스스로 목적을 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도처에서, 풀한 포기, 돌 한 조각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비로소 삶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으며,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존재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후 난 약 십여 년 정도를 화두와 위파사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 차이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위파사나는 최근 내가 인터텟을 통해 접한 정보이지 당시는 내가 위파사나를 하고 있다는 개념이 없었다. 다만 이 무엇고? 하며 '궁금해하는 것'과, 그냥 궁금해하는 이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가끔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이 무엇고?' 화두를 처음 들었을 때의 궁금함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인생의 목적이 특별하게 따로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고 나서는(큰 궁금함이 해소되고 나서는) 처음처럼 그렇게 의단(궁금함의 덩어리)이 생기지가 않았다. 바라보기와 별 차이가 안 느껴지는 것이다. 둘 다 똑같이 은은히 '자신을 바라보는 자'를 의식하게 될 뿐이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뚜렷이 구분이 안가는 것이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궁금해하는 것보다는 그냥 바라보는 게 조금 더 편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 다시 거론하겠다. '의식의 드러남'을 이야기하게 될 때 언급하고 싶다.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음은 더욱 평안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더욱 더 평안해지는 걸 느꼈다. 우선 무엇에도 그리 구애를 받지 않았다. 게을러도 그런 대로 만족이었고, 일을 하지 않아도 그런 대로 만족이었으며, 바둑 같은 걸 두어도 이기고 지는 것에 그리 상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은 언제나 때가 되면 벗어버리고 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육조단경을 만화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느 스님이 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밥 먹고, 잠자고, 똥 싸고 있다.'

'잘 하시고 계시는군요.'

'아하! 이 무엇일까 그저 그렇게 챙기고 있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이것도 나중에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후, 그러나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라보기나 화두가 잘 안될 때가 있더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몇 일이고 한번도 바라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마음에 그다지 소원하는 바가 없고 편해지니까 좀 게을러진 것이라고나 할까.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사라지고 나니 이제 깨달음이 좀 궁금해지는데 그 깨달음이란 것이 전과는 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달을 수 있다고는 언감생심이고 어느 생(내생이 있다면)에 될지도 모르는 것이며 언젠가는 사람은 깨닫게 되어있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렇게 목매달고 할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깨달음이란 게 사실 좀 누구에게나 막연한 것 아닌가.

혹시, 특별히 내가 태어난 목적 같은 것이 없다고 알게 되었듯이, 깨달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런데 한동안 좀 바라보기를 게을리 하고 있으면 느껴지는 게 있었다. 내가 감정에 많이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금 신경을 쓰고 바라보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았다.

자연히 '바라보기'는 나의 스트레스 대처법이 되었다. 그리고 좀 특별한 상황에서는 시험삼아 해보는(내면에서 웅크리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희미한 욕망 때문이라고 해야겠지만) 일상사였다.

예를 들면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탈 때, 바이킹을 탈 때, 급하게 뛰게 되었을 때 등등 좀 특별한 상황이면 아무 때나 바라보기를 시험할 좋은 기회로 이용하게 되었다(극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주 효과 있다고 앞글에서 언급한 것이 기억날 것이다. 이런 습관은 급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을 바라보기'였다. 바라보고 있다고 화나 짜증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 밖에는 달리 대책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감정이라도 오래 지속되는 감정은 없다는 걸 알았다. 내면의 평화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이었고, 그 외의 감정들은 늘 지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감정이 복잡해지면 내면의 평화가 그리워서라도 바라보게 되었고, 점점 시간이 가면서는 웬만하면 늘 평안한 편이니까 어떤 일로 복잡해질 때 '그래, 이런 감정도 지금이나 느껴보는 거지'라고 그걸 신기하듯 바라보게도 되었다.

깨달음에 대한 욕망도 점점 사라졌다. 아니 깨달을 필요가 별로 없었다. 그냥 이렇게 바라보며(혹은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살아가는 게, 바로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이었구나 라고 편안해했다. 십 여 년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마음의 평안은 계속 깊어지면서 그 형태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주가곡선과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지극히 평안했다가 어느 때 좀 약간 침체되고 또 그것이 지나면 좀 더 평안해지고 또 약간 침체하다가 그 다음은 더 깊은 평안이 드러나고...... 이런 식으로.

앞서 두 번째 글에서 언급했던 말을 한번 더 인용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미미하게 내부의 내 마음을 변화시켰고, 언제부턴가는 내가 순수하게 원했던 성욕과 마찬가지로, 내가 삶을 통해서 그토록 찾기를 원했던 순수한 욕망으로, 바로 나 자신의 진정한 삶의 목적 그 자체로 다가왔다."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이제는 더 이상의 방황 없이 오로지 행(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혹은 바라보는)만 남은, 그리하여 지극히 만족해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또 한번 영혼을 흔들어 깨워 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저 유명한 '바가반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감동으로 다가오는 그 궁극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

다음에 이어서 쓰겠다.


  • 06-12-19 마음
    합장입니다
  • 07-04-02 지나다가
    도움이 되신다니 반갑습니다. 그런데 다음 이야기는 없습니다.^^ 꾸준히 자기 자신을 바라보셔서 이런 류의 글들이 허접한 휴지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