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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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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24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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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 그 이후
name : 지나다가 수정 삭제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 그 이후
자주 둘러보게 된 인하대 장휘용 교수님의 사이트, 자유게시판에 우연한 기회에 글을 쓰게 된 것이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의 6편의 글이었다. 게시판의 어느 분이 ‘에크하르트 톨레를 집어던졌다’라고 했을 때 나는 톨레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톨레가 말했다는 ‘바라보기 명상법’이 이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구닥다리 명상법이라고 주장하는 그 분의 말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다. 평소에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웬만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성격도 아닌데 그때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한달 여를 그 글에 매달렸다. 자신을 내세우고자하는 에고의 발동일까 우려했을지언정 무언가를 얻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그야말로 순수하게 ‘정말 쓰고 싶어서’ 쓰게 되었다. 쓰고 나서는 속이 시원했고, 할 이야기는 모두 했다는, 어떤 면에서는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선 더 이상의 할 이야기가 없었다.
후에 그 문제의 책, 에크하르트 톨레가 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를 읽게 되었는데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두어 문장을 빼고는 마치 내가 쓴 글처럼 친숙하였다.
내게 있어서 ‘바라보기 명상법’은 인생이라는 길고 긴 터널의 어둠 저 끝에 보이는 희미한 불빛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또 어떤 주장이라도 인간의 관념을 벗어나기 어렵다. 관념들은 반드시 좌표를 가진다. 즉 어떠어떠한 조건 속에서만 참인 것이다. 조건이 확대되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어제까지 진리였던 것이 오늘 곧 허구가 되어버릴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관념들이라도 절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평안할 수 있다.
내가 죽고 나면 하나님에 의해 천국으로 인도되어 영생토록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수련법이 깨달음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라고 진정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의심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만 행만 하면 된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고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면 평안할 수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으면 그런대로 평화스럽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바라던 천국이 정말 있기는 한 것이며 그곳에 가면 과연 영원토록 행복할까라는 의심이 들 때, 지금 하고 있는 수련법이 과연 나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진리의 길인가 의혹이 생길 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삶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일까 회의가 들 때,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것들에 대한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 사람은 부평초처럼 이 세상을 허무히 떠돌 수밖에 없다.
진리라고 제시된 어떤 교리도 완전한 믿음으로 다가오지 않고, 왜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정말 누구인지, 한없이 답답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그 때 바라보기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없이 잡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지푸라기로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나는 누구인가?’궁금해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이 꿈처럼 애매모호한 현실에서, 전자는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의문이었고 후자는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참으로 궁금한 것이었다. 이 질문이 떠올려지는 순간 느껴지는 답답함은 설사 하늘을 날고 우주를 훨훨 날 수 있다하더라도 ‘나는 새장 속에 갇혀있는 한 마리의 새에 불과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며 그 답답해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명절날 고속버스가 아무리 지체되더라도 나는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아 괴롭더라도 나는 무던히 참을 수 있었다. 우주에 홀로 떠도는 공허한 존재라는 생각에 허망에 빠지더라도 나는 버틸 수 있었다. 그러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어떤 상황이든 이렇게 느끼고 있는 이 ‘나는 누구인가?’를 궁금해 하며 바라본다는 것, 그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답답함(궁금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것도 가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하르쉬가, 라즈니쉬가, 붓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누가 말했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나를 오로지 외길로 몰아 버렸다. 그 것밖에는 도대체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또 어떤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그 변화를 느끼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렇게 일어나는 궁금함을 바라볼 수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부처가 나타나더라도 죽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마하르쉬를, 라즈니쉬를, 붓다를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결과는 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 것이었고,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 역시 내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내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나는 누구인가?’를 바라보기도 믿을 수 없었다. 다만 그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선도수련을 하면서 어느 단계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 것이나 멀 고 먼 길이었다. 그러나 선도는 몸이 완벽한 상태에서만 완성이 가능하나 바라보기는 불구라도 의식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선도수련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좋으니까.
세월없이 자신을 바라보기를 생활화하던 나에게 그 날은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리고 전날 그토록 궁금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금함이 이상하게도 더 이상 가슴에 잡히지 않았을 때, 그러다가 갑자기 의식이 살아나(깨어) 있으면서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느껴졌을 때, 그리고 그 의식상태가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정지상태로 계속 드러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 이후 난 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처음 드러난 (살아난, 깨어있는)의식과 바라보는 자가 동시에 같이 느껴질 때, 몇 일간 혼동이 되었었다고 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의식이 드러난 상태에서도 이 드러난 의식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이 것은 무엇이냐고? 그리고 얼마 후 슬그머니 이 둘을 맞추어 보았더니 바라보는 자는 사라지고 드러난 의식만 남았다고 언급 했었다.
이 둘을 맞추어 보았다는 설명이 후에 보니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둘을 맞추어 보았다기보다는 바라보는 자를 의식하기를 이제는 그만 두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즉 바라보기를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늘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어서 바라보기를 그만 둔다는 생각보다는, 드러난 의식과 일치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드러난 의식은 나 개인의 의식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있는 존재 자체로 느껴졌다. 마하르쉬가 말한 영상이 아닌 영사막(screen)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이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혹은 교통사고 같은 큰 사고를 당하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비슷한 체험을 하는 것 같다. 그런 경험담들이 내게 드러난 의식과 비슷할 것이란 추측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사건이 끝난 다음에는 바로 그 상태는 사라지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나에게는 그 드러난 의식이 평상시에도 웬만하면 스스로 드러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라보기를 하고 있으면 그 상태가 일시적으로 문득 문득 드러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한다. 그러나 바라보기가 무르익어 의식이 맑아져 어느 순간에 웬만하면 늘 의식이 깨어있게 되는 상태에 돌입하게 되면 드러난 의식상태가 점점 평상시 의식상태로 변하게 된다. 이 때가 되면 비로소 바라보기를 그만 두어도 될 때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드러난 의식상태로 있을 때의, 다시 말해 깨어있을 때의 평화감은 실로 깊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의식이 저절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바라보기를 그만두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의식은 사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것 같다. 평상시에 일부러 바라보기를 하지 않더라도 늘 깨어있는 상태로 있게 되는 이 상태가 깨달음의 상태와 어느 정도 관련 있는 것은 아닐는지? 마침 깨달음이라는 말 자체도 ‘깨어있음에 도달해 있음’으로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의식이 드러난 이후 나의 인식이 특별히 변화한 것은 없다.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진리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특정한 종교 또는 특정한 진리가 새롭게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다만 드러난 의식 즉 그 존재 자체가 너무도 완전성으로 느껴져 신성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형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것에 귀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한 완전성(신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 신이라면 이제 난 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난 전혀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늘 나와 온전하게 함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드러난 이후 변한 것은 나의 정서상태이다. 무한한 평화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로부터 과거의 가장 슬픈 기억을 떠올려보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기억은 있으나 과거의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신기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전에는 과거를 생각하면 기억과 함께 당시의 감정도 어느 정도 함께 묻어있었다.
드러난 의식은 사진처럼 정지해 있어 아무런 느낌이 없다. 오로지 존재 그 자체로 무한히 안정되어 있을 뿐이다. 대학시절 나는 판단 없이 그저 사물을 바라보았다고 전의 글(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시는 나에게 자유의지가 손톱만큼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끝도 없는 공허감에 빠져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겨우겨우 삶을 지탱하였지만 지금은 무한한 평안 속에 이제야 가능한 범위 안에서 스스로 의지를 발현하며 충만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과거의 나에게 현실은 허망한 꿈에 불과했으나 지금의 나에게 현실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발 딛고 살아야 할 굳건한 땅이다.
의식이 드러난 이후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몇 가지 관념들이 있다. 먼저 지구대변혁이니,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창조주의 의도니 하는 것들이 나에겐 특별한 사건이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기대감, 물론 없다. 사실의 진위 여부가 궁금하기보다는 인간사를 다룬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인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담은 한편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의 사고가 지구를 떠나 우주로 확대 되고, 3차원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영계로, 혹은 몇 차원 더 올라가 신의 능력에 도달한다 해도 결국 무언가 추구하고 더 많은 능력을 바란다면 그만큼 평안과는 멀어진 셈이다. 지구대변혁의 끝이, 창조주가 안내하는 그 끝이, 만약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그런 이상향이라면 내게는 내가 존재하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이 바로 그 곳이다.
이런 상태에 있다보니 과거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존재들에 대한 경외와 막연함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붓다, 예수 이런 인류의 스승들이 이제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인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절대성을 인식해 왔던 것 같다. 하나는 붓다의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방법이다. 붓다는 체험에서 얻은 절대성으로 공을 주장했고(사실 붓다는 무아, 열반을 말했고 붓다 사후 500쯤 후에야 공으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예수는 계시적 차원에서 믿음의 대상으로 절대적인 신을 주장했다. 전자는 체험의 끝이고 후자는 계시에 대한 이성적 믿음의 끝이다. 그러나 후자 역시 종국에는 체험을 필요로 한다. 계시 역시 이성적으로는 절대적 진리로 판단될지라도 관념일 가능성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대개가 잠정적 만족으로 끝나 버린다. 이성적인 신뢰에서 출발한 믿음이 내 안의 절대성을 인식하는 진정한 체험으로 바뀔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안정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마음이 안정되다보니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누구에게나 궁금한 것이 죽음 후의 일이다. 아무도 알 수 없고 경험해 볼 수 없는 두려움의 세계, 혹은 준비된 신앙인들에게는 축복의 세계일지 모르나 내겐 그저 일상일 뿐이다. 얼마 전 친하던 선배의 죽음으로 화장장을 찾아 그가 화덕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이제는 내가 저 자리에 편안히 드러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상황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평화를 신기해했었다.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이것저것 정리해야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 어떤 사람은 지구대변혁을 못보고 죽는 것이 안타깝다거나 그 때까지는 살아야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종파에서는 몸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스님은 법문에서, 천재지변이 일어나 모두가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깨달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도 살아난다고(혹은 살려낸다고?) 하는 걸 들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대구 지하철 사건 속에 같이 있을 수 있으며, 안정된 사람이라면 이제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고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실제로도 당시에 식구들의 행복을 기원하고 자신은 하늘나라로 간다고 핸드폰 문자를 보낸 사람이 있다).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신이 인도해주는 갈 곳이 있어서 안정이 되겠지만 내게는 그런 믿음이 없어도 편안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나에게 죽음은 이제 별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도 의식이 있다면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변해있던 간에 지금 이런 상태로 만족해 있을 것이며, 의식이 없다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기에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식조차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라 해도 그것 역시 내가 의식할 수 없을 것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
죽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삶 또한 자연스럽고 편안해졌다. 자연을 돌아보면 삶과 죽음이 함께 어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같은 하나의 존재의 서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죽음은 인식하지 못하고 삶에만 관심이 가있는 것 같다. 죽음을 거부할 때 인간은 거기에 맞는 관념을 창조해 내지 않을 수없다. 부활의 상징성보다는 실재에 무게를 두고, 아직도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 믿고 시신을 처리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이비 종교가 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상태가 되면서 오히려 나의 생명은 영원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의식이 있을 때는 유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의식이 없으면 무로써 존재한다고 느껴지면서 현재 여기가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고향이듯 죽음 또한 내가 쉴 또 다른 고향으로 옮기는 것뿐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내게는 지금 이곳이 안정을 찾은 고향이듯, 죽음이 완전히 무로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그 곳 또한 다른 형태의 안정된 새로운 고향일 뿐이다. 죽으면 사람이 고향으로 간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현재의 느낌이 그렇게 편안하다는 것뿐이다. 죽음 후는 나는 모른다. 어쨌든 의식이 드러난 후 죽음에 대한 나의 정서는 이 삶에서의 영생이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언제라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을 모두 잃더라도 하루 세끼 밥 먹고 입고 누울 데 있다면 평안하겠지만 육체적인 고통이 따른다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참을 만 한 고통이라면 그런 대로 버티겠지만 그런 고통이 너무도 심하고 평생 완화될 조짐이 없다면 아마도 자살을 택할 것 같다. 어쨌든 나에게 현재의 이런 육체적인 상태로 영원히 산다는 개념은 없다. 아무 때고, 때가 되어 갈 때가 되면, 이제 편안히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깨닫게 되면 어떤 것을 얻는다거나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거나 하는 그런 기대가 아니라 아무것도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여한이 없는 상태, 이제는 편안하게 언제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때에 따라서는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상태, 오히려 이런 것들이 깨달음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깨달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하등 문제가 없다.
‘내가 이미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그 때부터 갇혀버린다’거나 ‘수행에 끝이 있을 수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같은 맥락을 바탕에 가지고 있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그때부터 더 이상 수행이 될 리 없으며, 따라서 그 이상 성장 변화의 가능성을 잃고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아집(또는 법집?)에 갇힐 것이라는 염려를 바탕에 두고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러한 생각에 반론을 달 수 없을 것 같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경구들이다.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깨달음에 대한 욕망도 버리라’라든가 ‘삶 자체가 수행이다’라는 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었구나’라든가 ‘이제야 내가 확실하게 한 발짝을 디뎠구나’라는 확고부동한 생각이 없다면 진정으로 깨달음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수 없다고. 불가의 용어 중에 ‘확철대오’란 표현이 있다. 희미하거나 의혹이 있다면 반드시 추구하는 바가 있게 마련이다. 확실하다는 것은 완전성을 의미한다.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인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확실히 인식하는 사람은 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정도로 이야기 하면 벌써 ‘이 사람 드디어 엄청난 에고에 잡혔구나’라고 딱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으로, 부처가 와서 그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러면 부처의 것과 나의 것은 다르군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있어서 내가 정말 깨달았느냐 그렇지 못하였느냐는 별 의미가 없다.
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미 이것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깨달음, 체험을 벗어난 절대의 자리라고도 하는 깨달음,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과정뿐으로 설명되기도 하는 깨달음, 그러나 내가 가야할 진정한 해방과 자유의 피안이라고 믿었던 깨달음, 내 인생에 있어서 절절히 나를 안타깝게 했던 깨달음. 나는 이제 그런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깨달음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도 편안하듯이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이제는 그저 이렇게 편안할 뿐이다.
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수행을 놓아도 무한한 평화가 스스로 샘솟아 사념에 휘둘려 번뇌에 빠짐이 없는, 혹은 번뇌에 빠질 일이 있더라도 빠르게 회복되는 그런 경지라면 ‘삶 자체가 바로 수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아집에 갇혀 정체할 것이라는 그런 걱정 같은 건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그런 완전성이야 말로 정체가 아닌 무한한 활기를 가지고 있는 진정한 생명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사념에 휩싸여 있을 때 사람은 그 사념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스로 의식이 드러나 있을 수 있을 때 마음은 사념에서 벗어나 현재에 있게 된다. 그것은 의지로 마음을 집중하지 않아도 사념이 끼어들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음은 조금이라도 집중하면 힘이 들어가 편치 않다. 그러나 집중하지 않으면 곧바로 사념이 끼어들어 사념에 갇혀버린다. 수행은 어떤 방법이든 집중을 요한다. 그러나 굳이 수행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식이 드러나 사념이 끼어들지 못하는 상태 그 때가 비로소 편안한, 진정 해방된 상태, 또는 이제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는, 무위의 상태가 아닐까 한다.
진리로 확신되는 관념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람을 해방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늘 미래에 있다. 죽음 후에 영생을 보장하는 어느 절대적인 신이라도, 때가 되면 저절로 지구대변혁을 거쳐 완전한 차원으로 회귀하여 본래의 근원의식으로 복귀한다는 발상도, 모두 그 해결을 미래에 두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내일로 향하게 하여 무언가를 기다리게 한다. 기다림은 욕망이 되고 그것은 현재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이 미래로 향해 있는 것은 현재의 나를 바라보아 사념(번뇌)을 녹여야 할 에너지를 바깥으로 향하게 한다.
의식이 스스로 드러나 무위의 상태가 되었을 때, 즉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멈추었을 때, 현재는 바로 축복이 된다. 사람들은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향해 있어 현재의 많은 것들을 과장하거나 놓치고 있다. 삶이 늘 고통 속에 존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누구나 편안한 구석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개 고통은 과장되고 편안함은 놓치게 된다. 고통은 실제로 들여다보고 있으면 참을만하게 무뎌지는 법이고, 즐거움은 반대로 배가된다. 몸을 가지고 있는 현실은 그만큼 불편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꿈처럼 유동적인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한 즐거움도 있는 셈이다. 보는 즐거움, 듣는 즐거움, 향기를 맡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접촉하고 나누는 즐거움. 생각이 편안하면 땅을 밟고 있다는 이 자체가 모두 즐거움이고 축복이다.
이 모든 즐거움들은 실제로는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인간을 고(苦)에 떨어뜨리는 원인들이 되지만 의식이 스스로 드러나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오히려 진정한 축복으로 변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현실세계를 성장을 위한 훈련장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어느 차원에서는 나는 여기가 바로 스스로 선택한 놀이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말씀은 기도 자체가 지금 바로 현재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 할 때, 늘 기도하며 현재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이 현실을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질 것이다. 천국을 미래에 설정함으로써 현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늘 불완전한 삶이 되고 마는 점을 우려한 말씀은 아닐는지.
대체로 어떤 것들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까지는 사실일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외부 조건들은 마치 모래성과 같아서 일시적이고 언제라도 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설사 외부조건이 완벽히 갖추어지더라도-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지만-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마음은 언제라도 또다시 공허해지거나 새로운 부족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실패에서 오는 좌절이나 남으로부터 받는 상처, 자신의 육체적인 괴로움 등 외부에서 오는 고통은 쉽게 경험해도 마음 깊은 근원적인 곳에서 솟아오르는 설명할 수 없는 내부적인 공허감은 자신도 모르게 놓치고 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외부에서 오는 고통이 사라지고나면 그 후 행복하게 되리라 상상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는 정도 해소되고 나면 오히려 그 때 한꺼번에 밀려오는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어느 누군가로부터 들었을 때, 혹은 스스로 하게 되었을 때 바로 이 공허감(혹은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영혼이 맑고 순수한 사람들이 더욱 깊은 외로움과 슬픔을 동반한 공허감, 내지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명예나 부귀, 권력에 생각이 쏠려있는 사람들은 아직 근원적인 곳까지 의식이 닿을 마음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론 내부에서 밀려오는 공허감을 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그 공허감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역으로 그 고통스러운 공허감은 내부의 깊은 평안이 뚫고 나올 수 있는 출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공허감을 걷어낸 후에 느껴지는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역시 알 수 없이 밀려오는 절대적 평안이기 때문이다. 이 때야 비로소 사람이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서가 아닌, 그냥 이유 없이 평안해지는, 근본적인 평안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내부에 엄청나게 잠재해 있는 깊은 평안(혹은 신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이 뚫고 나오려는 내적 신호가 그 공허감은 아닐는지. 근원적인 물음(나는 누구인가?)과 동 떨어진 외적인 고통, 혹은 관심거리에 집중해 있을 때 그것들은 이 근원적인 공허감과 거리를 갖게 하여 결국 깊은 평안과는 괴리된 주변만을 맴돌게 될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공허감이 내부에서 응결되어 터지려는 깊은 평안을 덮어 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의 출구라면 그 껍질을 쪼아주고 녹이는 지극히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그 공허감(출구)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강력한 에너지인 의식을 이 출구를 향해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향할 때 그것들이 일시적으론 이 공허감을 잊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출구를 열어 재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주의 어느 곳을 찾아 헤매더라도 이 공허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의 해결점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제공된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도 이 공허감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오직 이 공허감을 그대로 직시하여 우리의 의식으로 녹일 때 그 안에 이미 순수하게 존재하고 있는 지고한 평화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때야 비로소 그것은(드러나는 절대적 평화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혹은 관념)가 말하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또 도달 불가능하여 끝이 없다고 정의되는 그런 종류의 깨달음의 세계가 아닌, 바로 지금 현재에 체험하는 완전성으로 다가온다.
물론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어느 한 가지만이 옳다고 하는 교조적인 신념이다. 만약에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사고체계를 고집한다면 그 틀 안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나의 이러한 관념도 역시 마찬가지로 나만의 것일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라보기는 신념이 아니다. 내 판단에 바라보기, 그것은 분명히 과학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세계에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듯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내면의 정서를 순화시킨다는 것은 분명코 어느 누가 실현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재현 가능한 물리법칙과 동일한 것이라고 나는 안다. 운동이 근육을 강화시킨다는 것이 과학이듯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의식을 성장시키고 강화시킨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바라보기에는 집중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 모든 수련법이 집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의식의 집중은 의식을 강화시키고 정서를 순화시킨다.
우주의 모든 것은 꾸준히 진보해간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자연은 단순히 존재(being)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무엇인가로 되고 있는 중(becoming)이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무언가로 진행한다는 지향성과 완전성은 사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도 끊임없이 성장한다고 보는 것이 이성적이다. 하지만, 내가 진행 중에 있다고 생각하면 완전성은 그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절대적 평안 또한 그 순간에 미래로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드러난 의식 중의 평화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완전성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흔히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라고 한다. 모든 것은 프로그램 되어있는 것이니 내면의 느낌대로 살면 된다는 말이나 같은 맥락이다. 이 말을 들으면 나는 앞뒤가 바뀐 느낌이 든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말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역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 바라보기를 생활화하라고 말하고 싶다. 삶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이미 무위의 삶이다. 삶에 목적이 있을 때, 무언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을 때, 그 때는 이미 무언가에 마음이 향해있기 때문에 진정한 무위의 삶, 즉 현실이 그대로 수용이 되는 삶을 살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완전함을 체험하고 있다면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할 일은 없다. 그 때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 가능해진다. 천지가 개벽이 되든, 내 삶에 종말이 오든, 현실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상의 목적들을, 혹은 내가 스스로 목적으로 선택한 일상의 일들을 편안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자리에서 편안히 관조하며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능력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으로서 아직 그 물리적 패턴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영역인지 모른다 양자역학에서 최근에 전위궤도단원자원소나 마이크로클로스터, 보즈-아인슈타인 응축물이 잇따라 발견되고 인체 내의 미세소관이 연구됨으로써 그동안 신비주의의 영역이었던 텔레파시, 공중부양, 투시, 염력, 순간이동, 심지어 투명인간 등 모든 초능력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한쪽에서는 추측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초능력은 인간들이 바라는 이상일 것이다. 만약 우리 존재가 완전히 변형되고자 한다면 우리 몸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우리 몸이 변하지 않고서 이 지상에서 신성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가 빛의 인간으로 화하여 우주의 새로운 진동을 받아들이게 될 때의 높은 의식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아직 무언가 바라고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 즉 완전한 상태에서는 그런 초능력들과 무관하게 평화로울 수 있다. 내게 있어서 초능력은 부나 명예, 권력 또는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첨단과학과 같은 속성의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이 편리해 질 수는 있어도 진정한 해방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초능력의 극치는 아마도 창조의 능력일 것 같다. 『초인생활』에서 어떤 존재들은 물질을 창조하기도 하는 신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이 ‘나는 누구인가?’라고 궁금해 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어딘가 코믹한 느낌이 된다. 만약에 그들이 ‘나는 누구인가?’의 궁금함에서 해방된 존재들이라면? 의식의 차원에서 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초능력, 빛의 인간 그와 같은 것들도 보편화되면 그저 요즘의 자동차가 평범한 것이듯이 별스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이 반드시 이 우주의 탄생 비밀을 알고 전생과 미래를 알며 이 육체가 마치 에테르로 변화되어야만 해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인간이 궁금해 하는 존재의 모든 비밀이 정확히 드러났다고 해서 해방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런 것들은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고 잠정적인 만족을 줄지언정 궁극적인 해방과는 거리가 있다, 인류는 끝없이 그런 지식들의 탐구를 위해 정열을 쏟아 부울 것이고 또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알더라도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왜 존재해야하는지 잇따른 질문을 끝없이 퍼부어 댈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날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스티븐 호킹은 말했지만 그때에도 존재이유에 대한 인간의 갈증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서 해방되고 의식이 스스로 드러났을(깨어났을)때 비로소 나는 현재에 지극히 만족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의문을 품지 않게 되어 그런대로 평화스럽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느낌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모든 (초)능력을 넘어서, 모든 차원을 넘어서, 의식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넘어야 할 궁극적인 질문인 셈이다.
궁극적인 질문에서의 해방이, 무언지 모르는 무한한 답답함에서 벗어난 청량한 시원함이라면, 드러난 의식은 이 육체가 답답하고 어려워 할 때 내가 언제라도 안주할 수 있는 명상의 영역이다. 무언가 목적을 위한 명상이 아니라 내게는 바로 모든 목적이 실현되고 있는 그런 명상의 영역이다. 또 드러난 의식은 모든 생각이 멈추어버린, 모든 의문이 녹아버린 불랙홀과 같은 상태이지만 절대적인 평안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무엇으로부터도 창조되지 않은, 그리고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 의식이 있는 한은 감지되지만 의식이 사라지면 동시에 그것도 내 의식에서 사라져버리는, 불멸의 영원성(신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에 인격적인 속성을 부여하거나 그것을 모든 창조의 주체자(창조주)로 설정하였을 때 그 절대성(신성)은 육화되어 에고의 영역으로 떨어져 버렸던, 인류에게 공이라고 표현된 또는 유일신(신성)이라고 인식된 영역으로 내게는 다가온다.
어차피 지구는 변할지 모른다. 빙하기라든가 자기장 등의 주기적인 변화가 반복되는, 생명체에게는 위험한 시점에 지구가 처해 있다는 과학적인 보고가 잇따르고, 갑작스런 인구의 폭증으로 심하게 오염되고 있으며, 자원과 에너지의 고갈이 불 보듯 뻔한데 인류가 새로운 지혜를 짜내지 않으면서도 지구상에서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은 우주시대에 맞는 상상력이든 실제로 일어날 일이든 간에 포톤벨트로의 진입이니 5차원으로 혹은 무한차원으로의 상승이니 창조주의 창조주들이 계획한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나는 누구인가?’는 마찬가지로 남는 과제이다.
인간의 사고는 이제 지구를 벗어나, 소위 채널링을 통한 요즈음 영성계의 정보는, 다차원 우주로 확대되었고 창조주도 뛰어넘어 창조주의 창조주를 설정하게 되었다. 과연 그 끝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끝을 모르는 완성의 길을 향한 과정에 있다. 내가 아직 완성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라면 이 과정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지금 이 현재는, 먼 미래에 도착해 있을 완성된 나의, 고달픈 추억거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키네시스(kinesis)는 질적으로 변화 중인 운동, 즉 과정이다. 엔에르게이아(energeia)는 완전함 그것도 정체가 아닌 활동하는 완전함이다.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성적으론 판단된다. 키네시스가 언젠가는 엔에르게이아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둘은 지금 동시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과거에 늘 목표는 미래에 있었고 따라서 마음은 현재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다. 현재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도착해야할 곳은 우주 어느 곳에도 없다. 가야할 그런 차원도 없다. 나를 내려 보낸 상위자아, 그런 건 모른다. 기다려야할 메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설사 계획된 연극이라고 해도 이 연극이 끝난 후 기다리고 있는 축하의 파티, 그런 건 나에게 없다. 지금 이 연극이 모두이다. 나의 모든 것이 현재에 과정 중에 있더라도 동시에, 지금 드러난 이 의식은 마찬가지로 현재에 내가 느끼고 있는 바로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드러난 의식이란 것이 어렵다거나 특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것이다. 자신에게 지금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지 한번 의식(생각)해보라. 아마 잠시 동안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은 의식이 될 정도로 살아(깨어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상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러나 의식은 살아(깨어나)있는 상태.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 상태로 한동안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행이 없는 사람에게 절대로 이 상태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상태를 안다고 하여도 계속 유지하기는 정말로 힘들다. 자신도 모르게 다시 여러 생각이 끼어들어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면 정말 너무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여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을 써도 그 상태는 금새 깨어지고 다시 사념이 끼어 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득 문득 이 상태로 접어들며 이 상태에서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없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어느 선각자가 있어 그것이 모두가 아니라고, 이제 시작도 못한 것이라고, 거기서 더 나아가 24시간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난 여기서 만족할 것이다. 이 상태는 화두를 쥐고 의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화두가 녹아버린 상태, 의심이 녹아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상태가 너무도 편안하다고 하여 이를 24시간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혹시 그렇게 되면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거나 창조주의 메시지를 받는다거나 특별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어느 선각자가 권고하더라도 난 그런 것들을 위해서 더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제 그와 같은 것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며 지향점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에 치열하게 화두를 들어 오매일여라든가 등등을 겪었던 사람들은, 화두가 녹은 후에 드러난 의식상태(깨어난 상태)가 그처럼 늘 유지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의식성장이 그러한 쪽으로 지향되어 있다면 이제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가게 되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도 이젠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만족하고 있다.
내가 한번도 내 안의 완전성을 느껴본 적이 없고 오로지 과정에만 노출되어 있다면 완전성에 대한 향수가 있겠지만 아무 때고 몰입할 수 있는 내 안의 완전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오히려 이 과정은 내 안의 완전성과 합하여져 더 큰 완전성의 서클을 이루지 않겠는가.
이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희망적인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로 어떤 절망적인 이야기에도 무심히 지켜보며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 어떤 스토리가 전개된다하더라도 지금 내게 허용된 시간에, 내가 선택한, 바로 지금 현재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었던 과거가 아련하다.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자신 이외에 주변을 돌아 볼 여유도 없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비로소 정신이 건강해지고 평범해진 기분이다. 과거에 우주에 홀로 남은 듯한 외로움과 공허에서 주체할 수 없었던 의식이, 우주에 나 홀로 남더라도 그리고 현재의 의식으로 남은 시간이 영원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살아갈 자신이 생겼다.
‘내가 번뇌와 마주했던 수행법’을 쓴 이후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조그만 경험이지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보기는 사실 쉬운 것은 아니다. 집중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지만 누구에게나 맞는 방법이 아닐 수도 있고, 따라서 여러 수행법들이 발생한 것은 자연적인 것일 것이다. 또 모든 집중은 힘이 들기 때문에 역으로 모두 놓아버리고 마음의 흐름대로 두어버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 한다(그것은 차후 계기가 되면 새로운 힘으로 집중하게 한다). 현재에 접하게 된 어떤 관념(혹은 진리라 느껴지는 주장)이 너무도 완벽히 마음에 새겨져 그것이 시키는 대로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 이외에 어떤 수행법도 그에겐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도 저도 아닌 사람들에게, 바라보기가 맞지 않는 경우야 할 수 없지만 할만한 사람들도, 혹시나 이것을 이젠 필요 없는 수행법으로 취급할까 염려되는 마음에, 그리고 당장에 어떤 수행법도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도 바라보기가 비교적 편하다면 노느니 염불한다고 쉬엄쉬엄 자신을 바라볼 것을 권하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람들의 공통적인 희망인지, 인류가 존재했던 곳에는 언제나 그랬었지만, 어쨌든 이 시대에 특히나 여러 군데서 이구동성으로 지구의 혹은 우주의 새로운 시대, 좋은 시대가 온다고들 하니 사실 여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추신: 본인은 특정단체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고 특정인을 비방하고픈 사람은 더더욱 아니며 살다보니 구도의 삶과 어느 정도 인연이 되어버린 사람일 뿐입니다. 진리보다도 개인의 진실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장휘용 교수님이 진실된 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글인데 요즘에 마무리가 되다보니 이 사이트와는 맞지 않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전에 글을 올렸던 후속편이기에, 또 자신을 사명자라 생각하건 아니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유용한 삶의 방식이 있지 않을까 하여, 이 게시판에 실례가 될까 염려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올리며 혹시 게재가 되지 않더라도 이 사이트의 방침을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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