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손자 아그립바는 그의 나이 10살이 되던 해(AD6)에 유학을 가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 드루수스 부인 안토니아아 집에 머물게 되었다.
장성해서도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안토니아를 대신해서 가사를 맡아 보는 중에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키프로스 태생의 여자와 결혼을 했고, 슬하에 두 딸과 아들을 두었다.
안토니아에게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두 아들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일찍이 로마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날리다가 시리아에서 식중독 증세를 보이며 죽었고, 당시 시리아 총독이 독살 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던 아그리피나는 피소를 원로원에 고발하는 중에 오히려 국가반역죄로 폰티아 섬에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죽었으며, 외톨이 신세가 된 칼리굴라가 할머니를 찾아왔던 것이다(AD33).
당시 아그립바는 38세였고, 칼리굴라는 17세였다.
그동안 유대에 돌아가 왕 되기를 청했으나, 유능하지만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티베리우스 황제는 거절했으며, 그가 노환으로 죽고 칼리굴라가 새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서 왕 칭호를 내렸다(AD37).
그러나 정작 가서 있어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북부지역 가을라니티스, 바티네아, 트라코니티스, 아우라니티스 빌립의 땅이었다.
당시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은 마르겔루스 총독이,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은 안티바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유대 북부지역은 빌립이 죽고(AD34) 공석 중이었다.
아그립바는 귀국 길에 올라 자신의 땅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의 헤롯 궁전에 머물면서 은근슬쩍 왕 행세를 하려들었다.
일년 내내 가이사라 별장에서 보내며 축제 때나 예루살렘을 방문하던 마르겔루스 총독으로부터 한 소리 듣는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버티고 있으면 싸우려는 자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예루살렘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갈릴리 호반의 티베리아에서 살고 있던 안티바와 헤로디아는 아그립바가 왕 칭호를 받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샘이 나서 칼리굴라 황제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그립바가 미리 사람을 보내 모함하는 바람에 로마가 빤히 보이는 지점에서 유배당하는 신세가 된다(AD39).
안토니아 집에서 속주 왕자들과 합숙을 하고 있을 당시, 로마황제는 무관인 반면 동방의 왕들은 왕관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칼리굴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면, 왕관을 쓰기보다는 유피테르(쥬피터)신상에 내 얼굴을 새기게 할 것이요.”
그리고는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무섭게 유피테르 신상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게 했다.
도시마다 새 신상이 세워지는 가운데 칼리굴라 황제가 병을 얻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얌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유피테르 신상 앞에서 황제의 쾌유를 비는 의식을 치르는 가운데 일단의 유대인들이 몰려가 난동을 부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도처에서 유대인들이 보복성 공격을 받았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유대인 상선과 점포에 불을 지르거나 약탈을 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가 직접 나서서 유대인 거주지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웠다.
그곳 회당장 필로(BC10~AD45)가 대표단을 이끌고 황제를 찾아간 자리에서
“다른 속주 백성은 나를 신으로 인정하는데, 너희들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신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이토록 화를 내는 바람에 필로는 유피테르 신상 철거를 말해보지도 못한 채 밖에 나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하나 이는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걱정할 것 없네. 우리 다 같이 용기를 내도록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속이 상하더라도 쉽게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황제가 전해 듣기라도 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칼리굴라 황제는 시리아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인들은 전전긍긍하는 가운데, 당시 메시아의 도래와 말세를 선전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유피테르 신상 자체를 ‘멸망케 하게 가증할 것’ 이라고 선전하면서 민심을 더욱 흉흉케 했다.
아그립바는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 황제의 명령을 철회시킬 수 있다고 장담을 하면서 로마를 향해 달려갔으나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한 통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편지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죄를 묻는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의 선물을 좋아하는 것 같소.
총독으로써의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황제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소.
그대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라오.
잘 가시오.’
아그립바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페트로니우스에게 미안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가운데 칼리굴라 황제에 대해서도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로마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칼리굴라 황제가 원로원 의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으며, 측근들로부터도 원성을 사고 있다는 말을 하게 된다.
이에 항명을 결심한 페트로니우스는 로마로 잠입할 결심을 한다.
칼리굴라 황제는 다시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를 보냈으나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피테르 신상 건립을 추진하는 중에 칼리굴라 황제가 친위대 대장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AD41).
급히 플라쿠스 총독이 이집트로 돌아가던 중 실종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돌아가서 일등공신이 된 페트로니우스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는다. 뒤이어 새 황제 글라우디우스로부터 할아버지 헤롯의 전 영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이사라 북쪽 칼기스와 아빌론 지역을 하사받는다.
명실상부 유대 왕이 된 아그립바는 성전 뜰에 마련한 대관식장에서 신명기 17장을 히브리어로 읽고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보에뚜스가문의 사제 시몬으로부터 공격성 발언을 듣는다.
“저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두메 출신 헤롯의 손자입니다.
조금 전, 저 사람은 이방인은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
시몬은 아그립바가 읽은 대목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사제들은 헤롯의 조상이 이두메 출신이라는 사실을 백성에게 알리려는 속셈에서 그 대목을 읽게 했던 것이다.
사제들의 반대를 예상하지 못했던 아그립바는 눈물까지 보이면서 어찌할 바 몰라 하고 있는 중에 예루살렘 회당장 가말리엘이 단상에 뛰어오르면서 아그립바를 감싸는 발언을 한다.
“걱정하지 마시요 아그립바 !
당신은 우리의 형제요.”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왕을 에워싸면서 다함께 소리를 지른다.
“아무렴 우리의 형제이지.
우리의 형제이고말고.”
대관식 이후, 아그립바는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바리새인들과 국정을 논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아그립바는 그동안 사회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던 바리새인들과 메시아꾼들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법이 사두개인들의 규례에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으로 바뀌고, 건국의 날과 새 국호가 선포된 가운데 유대는 온통 바리새인들 세상이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 북쪽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게 하면서 은연중 로마와 대적하는 쪽으로 국정을 몰고 간다.
반격에 나선 사두개파 사람들이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아그립바를 찾아가 ‘팍스로마나’ 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면서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 실종사건은 ‘당신이 사람을 보내 저지른 살인’ 이라고 협박을 한다.
그 순간, 아그립바는 쇼크를 받고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AD44년).
유대는 4년여 자치권을 누리긴 했으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그립바가 죽자 이내 로마인 총독을 다시 보내 예전의 속주 체제로 만들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