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같은 상황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는 경우에도 청취자 인생경험의 폭과 깊이에 따라서 그 단어가 전달되는 느낌의 깊이와 폭이 달라집니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을 때 ‘달콤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신맛’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에야 ‘부사’를 비롯하여 달콤한 사과 품종들이 많이 개량되었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신맛의 ‘국광’이나 ‘홍옥’이라는 종류의 사과가 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사과’란 단어를 들을 때, 국광만을 맛본 할아버지는 신맛을 느끼면서 몸서리칠 수 있고, 부사만을 맛본 손자는 달콤한 느낌에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신(神)’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야훼’를 생각하는 자가 있고, ‘우주’를 생각하는 자가 있고,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는 자가 있으며, ‘귀신’을 생각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도, 종교라는 단어를 들을 때도 같습니다.
저는 각각의 사람(존재)마다 각자의 욕망만큼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어떤 이는 기독교에 불교와 유교를 더하고, 또 어떤 이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까지 종교의 범위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천국’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도 청취자들은 자신들의 욕망만큼 ‘천국’을 그립니다.
어떤 이는 시원한 여름에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에 누워있는 자신을 아름다운 여인들이 부채로 부쳐주고 다른 여인이 발마사지를 해주는 모습을 상상하고,
어떤 이는 금은보화가 가득한 넉넉한 삶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인들이 모여 교회에서 기도를 하는 삶을 상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불교도인들만 절에 모여 기도를 하는 삶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목사님 딸의 신분으로서 40년 이상을 기독교인으로 열심히 살아온 제 여자 후배는 “천국이란 제 심장이 죽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태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천국이란 단어를 말할 때 루가복음 17장 20절 21절을 떠올립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And when he was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영어 원문이 [Once, having been asked by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Jesus replied, "The kingdom of god does not come with your careful observation,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라고 기재된 것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