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당연한 세상3

06-10-24 원정 811
 

지난 주 토요일에 관악산을 등산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관악산 줄기를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물어서 산줄기의 나뭇잎들이 붉게 단풍이 들기도 전에 누렇게 낙엽 되어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들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어떻게 바위틈에 저렇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가물면 푸른 잎들이 낙엽 되어 떨어지는 것,


바위틈에 흙이 있고 소나무 씨앗이 떨어지면, 그 곳에 비라도 내려주면, 그 씨앗이 발아되어 모질게나마 소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산야의 돌멩이 하나도


다 있을만한 곳에 있습니다.





인생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에서 살펴보면


그가 선택한 행동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행동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두 이유 있는 행동입니다.





내 잣대로


즉 나의 조건이나 상황을 통하여


그 사람을 바라보니


그가 어수룩해 보일 따름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잣대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내 시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각자 얻을 뿐이지요.





모든 존재들은 존재할만한 곳에 존재하고


모든 사람들의 선택은


그들의 조건이나 상황에서는


언제나 최선인 것이지요.


이렇게 이 세상은 너무나 당연한 세상입니다.





어느 분의 말처럼


“손댈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것은 오직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고 내 욕망을 채울 수 있기를,


남을 기쁘게 하면서 내 욕망을 채울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전 관점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쇠똥은 도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똥에 불과하지만,


농부의 관점에서 보면 거름이요,


쇠똥구리(말똥구리)의 관점에서 보면 주택의 주재료이지요.





‘어떻게 살아도 좋다. 다만 대다수 구성원들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규칙을 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건강한 에고를 뽐내며 사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게 바로 저의 관점입니다.









  • 06-10-25 바람
    ㅎㅎ. 다 맞는 말씀이구요. 다 각자 보기 나름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최악(?)의 상황이 왔을때, 그것이 곧 최선의 다름이 아님으로서 믿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가 나의 오른뺨을 쳤는데, 그것이 최악으로 믿어지지 않고,
    도리어 최선으로 믿어지면서, 도리어 당연하다고 여겨지면서 왼뺨까지라도 돌려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더 이상 손댈것도 없이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취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욕망이 승화되어, 그것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다 최선으로 보이기에 스스로 그러하겠지만, 욕망이 아직 승화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최선이 오히려 최악으로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되어지게 된다. 이렇게 봅니다.

    저는 요사이 인터넷상담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러한 욕망을 보게 됩니다.
    자기 욕망(만족)을 채울려고 하는 입장에서 보니, 당연한 것들이 오히려 최악으로 보여 스스로 갈등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 눈에는 그들이 잘못한 것으로 보이지를 않고, 다 최선으로서 대한 것으로 보여지는데(설사 욕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눈에는 자아의 욕망(만족)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그것을 보다 보니, 스스로 그렇게 되어짐을 알게 됩니다.
  • 06-10-25 원정
    아멘입니다.

    다만, 바람님이 깨달은 바를 일반 사람들이 그대로 행하다가는 화병이 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답글을 달아 봅니다.^^

    전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에 음악의 수준이 팝송-세미클래식-클래식 순서로 더 높다고 가정해 보면...
    팝송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미클래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세미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은 클래식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스승으로부터 팝송보다는 세미클래식이 세미클래식 보다는 클래식이 더 수준높은 음악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겠지요.

    그런데 제 경험상으로는 팝송을 듣다가 질려지면 세미클래식이 관심이 가고 세미클래식이 질려지면 클래식에 관심이 가는 면이 있더군요.
    결국은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질리도록 해봐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질리도록 성취해봐야 그 다음단계로 업그레이드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가 나의 오른뺨을 쳤는데, 그것이 최악으로 믿어지지 않고,
    도리어 최선으로 믿어지면서, 도리어 당연하다고 여겨지면서 왼뺨까지라도 돌려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한편으로는 위 바람님의 말씀이 더 수승한 단계임을 저도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정말로 더 수승한 단계가 있는가?
    그런데 더 수승한 단계가 있는지는 어떤 때는 의문이 듭니다.
    사람에 따라서 수승한 단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팝송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클래식이 더 수승한 단계라고 알려주어도 팝송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클래식이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순간에는 그에게는 팝송이 수승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빰을 때리는 자를 같이 뺨을 때리면 왜 안될까요?
    그냥 도망가면 왜 안될까요?
    누가 나의 빰을 쳤을 때 왜 그것이 최악으로 믿어지지 않고 최선으로 믿어져야 하는가요?
    왜 왼뺨까지 돌려대야 하는가요?


    제 눈에도 사람이 살면서 좀 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라는 것도 각자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야생에서 자란 화초가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화초보다 더 튼튼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화초들을 적응기를 거치지 않고 갑자기 밖으로 내어 놓는다면 그 화초들은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절대적인 최선은 없다.
    다만 상황에 따라 그 답은 다를 뿐이다.

    지금 바람님이 깨달은 바를 일반 사람들이 그대로 행하려고 하다가는
    화병이 나서 죽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왼쪽 뺨을 때렸을 때 오른쪽 뺨을 내놓아 다시 뺨을 맞으면 억울함에 집에 가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에 맞게 가장 솔직히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삶이 종교요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06-10-25 바람
    ㅎㅎ. 그래요. 그러니 그렇게 믿어지는 대로 행하게 되고, 그렇게 능력이 되어지는대로 행하게 된다. 즉, 억지로 되는 일이란 단 하나라도 없다.

    억울함이 믿어지면 억울한 대로 행하게 되고, 억울함이 그 능력으로 금방 해소가 되면
    전혀 하나도 억울해 하지 않음으로 행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저는 자기자신을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라기 보다는, 자기자신을 속이는 에고가 이미 없음을 인식하는 그 상태(깨여있는 의식)로서, 있는 그대로 지켜봄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태양과도 같은 그 근원에서 나오는 그 빛과 파장으로서 그 상태를 감싸안듯이 그대로 지켜보는 감화적 상태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