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에 관악산을 등산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관악산 줄기를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물어서 산줄기의 나뭇잎들이 붉게 단풍이 들기도 전에 누렇게 낙엽 되어 떨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들을 보면서 생명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어떻게 바위틈에 저렇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가물면 푸른 잎들이 낙엽 되어 떨어지는 것,
바위틈에 흙이 있고 소나무 씨앗이 떨어지면, 그 곳에 비라도 내려주면, 그 씨앗이 발아되어 모질게나마 소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산야의 돌멩이 하나도
다 있을만한 곳에 있습니다.
인생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조차도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나 상황에서 살펴보면
그가 선택한 행동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행동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두 이유 있는 행동입니다.
내 잣대로
즉 나의 조건이나 상황을 통하여
그 사람을 바라보니
그가 어수룩해 보일 따름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잣대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나는 내 시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각자 얻을 뿐이지요.
모든 존재들은 존재할만한 곳에 존재하고
모든 사람들의 선택은
그들의 조건이나 상황에서는
언제나 최선인 것이지요.
이렇게 이 세상은 너무나 당연한 세상입니다.
어느 분의 말처럼
“손댈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것은 오직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지 않고 내 욕망을 채울 수 있기를,
남을 기쁘게 하면서 내 욕망을 채울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전 관점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쇠똥은 도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똥에 불과하지만,
농부의 관점에서 보면 거름이요,
쇠똥구리(말똥구리)의 관점에서 보면 주택의 주재료이지요.
‘어떻게 살아도 좋다. 다만 대다수 구성원들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규칙을 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건강한 에고를 뽐내며 사는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게 바로 저의 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