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이들은 의식의 기본상태(생명, 공, 의식의 본래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언어와 문자를 배우면서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생각 속에서(의식의 변형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이후 끊임없는 생각의 윤회 속에서 생각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은 의식의 기본상태에서 맹렬하게 떠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하지 아니하고 단지 그대로 쉬면(단지 존재하면), 생각으로 어떤 것도 잡지 아니하면, 의식의 본래상태는 저절로 회복됩니다.
마치 컵에 든 흙탕물을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컵 속의 물이 맑아지듯이.
그런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무의식적으로) 생각을 움직이면서 뭔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컵에 든 흙탕물을 맑게 만들겠다면서 막대기로 컵 속의 물을 휘젓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의 상태는(空은) 의식의 변형상태가 아니라 의식의 기본상태(본래상태)입니다.
법문을 하면, 생각을 쉬라고 하면서 생각이라는 분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모순에 처합니다.
벽에 낙서를 하지 말라면서 벽에 낙서금지라고 낙서를 써놓는 경우처럼....
그래서 입만 벌렸다 하면 허물을 짓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즉, 개구집착(開口執着)이란 말이 있는데, 법(진리)은 입만 벌리면 어긋나고, 설명을 했다 하면 벌써 거리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구집착이 두려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의식의 기본상태(진리)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무아와 연기의 뜻도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 덩어리(에고)가 공함을 알았으면, 생각을 내려놓으면 되지 무아와 연기를 가지고 새로운 생각의 집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갓난아이들이 무아와 연기의 의미를 알아서 의식의 기본상태(본래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고가 환상임을 이해했으면 그냥 쉬면 될 일이지, 의식의 기본상태(본래상태)로 돌아가기 위하여 생각으로 무아와 연기를 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생각의 윤회를 단지 멈추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가 났을 때, 공을 처음으로 체험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추니 그 자리가 드러났겠지요.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그 자리를 체험한다고도 하더군요.
의식의 기본상태(본래상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생각을 멈추면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생각의 윤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각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자의 뜻은 모두 생각 덩어리입니다.
아무런 이해 없이(분별 없이), 깨달은 자들의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생각은 저절로 쉬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