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얼 물어도 구지선사가 손가락 하나 세워 보여주는 걸 본 동자는, 구지가 잠시 나간 사이 찾아온 학인이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가르치시던가?” 묻자 구지와 똑같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곤 그 얘기를 돌아온 구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구지는 칼을 몰래 가져와선, 동자에게 다시 불법을 묻는다. 동자는 매번 보던 대로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여준다. 그러자 구지는 그 손가락을 얼른 붙잡아 칼로 잘라버렸고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가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바로 그때 구지가 손가락을 하나 세우니 동자가 훤히 깨쳤다.
그때 동자는 뭘 보았을까?
위 글은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서 고윤숙 화가의 글에서 가져온 글인데, 고윤숙 화가는 “손가락이나 주먹이나 세우는 것을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면목’이나 ‘체’라고 하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것이라고들 하겠지만, 내가 구지의 세운 손가락에서 본 것은 그 손가락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세계다. ‘마음’이라 하든 ‘생각’이라 하든, 내가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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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물에 돌맹이를 퐁당퐁당 던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퐁당 소리에만 집중한다.
계속하여 스승은 큰 돌도 던지고, 작은 돌도 던지고....물에다가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고, 여기 물이 있다고....
여기서 돌맹이든, 나뭇가지든, 손가락이든 무의미하다.
낙처는 물이다.
밤에 부엉이가 법문을 한다.
부엉부엉
사람들은 부엉이 소리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때 밤의 고요도 함께 드러난다.
그 고요에서 부엉부엉 소리가 드러난다.
낙처는 그 고요이다.
음과 음이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그러나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없다면, 그 음들의 높낮이가 드러날까?
그 침묵 속에서 다양한 음들이 드러난다.
낙처는 침묵이다.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하나 드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원리이다.
그 손가락이 떠오르는 배경이 낙처이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떠오르지 않았는가?
그 자리는 생각이 떠오르는 자리와도 같은 자리이다.
그 자리가 바로 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