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선사와 동자승  4

24-03-06 원정 67

누가 무얼 물어도 구지선사가 손가락 하나 세워 보여주는 걸 본 동자는, 구지가 잠시 나간 사이 찾아온 학인이 “스님께서는 평소에 어떤 법으로 가르치시던가?” 묻자 구지와 똑같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리곤 그 얘기를 돌아온 구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구지는 칼을 몰래 가져와선, 동자에게 다시 불법을 묻는다. 동자는 매번 보던 대로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여준다. 그러자 구지는 그 손가락을 얼른 붙잡아 칼로 잘라버렸고 동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구지가 소리를 질러 동자를 부르니 동자는 머리를 돌렸다. 바로 그때 구지가 손가락을 하나 세우니 동자가 훤히 깨쳤다.  

그때 동자는 뭘 보았을까?  

위 글은 불교언론 법보신문(http://www.beopbo.com)에서 고윤숙 화가의 글에서 가져온 글인데, 고윤숙 화가는 “손가락이나 주먹이나 세우는 것을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면목’이나 ‘체’라고 하는 것을 가시화하려는 것이라고들 하겠지만, 내가 구지의 세운 손가락에서 본 것은 그 손가락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세계다. ‘마음’이라 하든 ‘생각’이라 하든, 내가 손가락 하나 세우는 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썼다.  


.................  


스승은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물에 돌맹이를 퐁당퐁당 던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퐁당 소리에만 집중한다.

계속하여 스승은 큰 돌도 던지고, 작은 돌도 던지고....물에다가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고, 여기 물이 있다고....

여기서 돌맹이든, 나뭇가지든, 손가락이든 무의미하다.

낙처는 물이다.    


밤에 부엉이가 법문을 한다.

부엉부엉

사람들은 부엉이 소리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때 밤의 고요도 함께 드러난다.

그 고요에서 부엉부엉 소리가 드러난다.

낙처는 그 고요이다.  


음과 음이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그러나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이 없다면, 그 음들의 높낮이가 드러날까?

그 침묵 속에서 다양한 음들이 드러난다.

낙처는 침묵이다.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하나 드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원리이다.

그 손가락이 떠오르는 배경이 낙처이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떠오르지 않았는가?

그 자리는 생각이 떠오르는 자리와도 같은 자리이다.

그 자리가 바로 空이다.

  • 24-03-06 여원남주
    몽지님왈,
    “구지선사가 손가락을 하나 드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원리이다.
    그 손가락이 떠오르는 배경이 낙처이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떠오르지 않았는가?
    그 자리는 생각이 떠오르는 자리와도 같은 자리이다.
    그 자리가 바로 空이다.”

    동자승이 손가락을 객관을 향해 즉, 대상을 향해 들어올렸을 때는 동자승에게 주관과 객관이 있었다. 근데, 손가락을 잘린 후, 들어올리려고 하니까, 아픔이 느껴지고, 무려 손가락까지 잘려서 없어져 버렸어.
    그때 비로소 동자승은 대상으로만 머물던 한 손가락들기인 객관과 아픔을 느끼는 대상인 자기라는 주관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본 것이다. 손가락이 잘리고서야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보게 된 것이고, 주관과 객관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불법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저 나와 무관하게 움직였던 것은 실상이 아니고,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그게 불법이다.

    내가 사라지는
    내가 아웃되는
    일체가 한 통속되는 체험이 없으면 공은 이론으로만 맴돌 뿐.

    공을 주어가 체험하면, 끝끝내
    불법의 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공을 객관으로
    자신은 주관으로 있기 때문.

    공을 돈오하지 못하는 것은
    구지선사와 한 손가락처럼 하나가 된 게 아니고,
    동자승의 한 손가락처럼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

    손가락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허공이 있다고?
    누가 느껴?
    너가 느껴?
    그렇다면 너는 그 순간 허공이야, 바보야!!!
    그 순간 너는 사라졌다고!!!!!

    아상이 성성한 가운데 공에 머문다는 느낌은
    그냥 아상일뿐!!!

    연기된 나
    연기된 생각
    연기된 의식
    에서
    나, 생각, 의식만을
    뚝 잘라서
    나라고 하고,
    생각이라고 하고,
    의식이라고 하고,
    그런 건 불법이 아니라고!!!

    자꾸
    뚝 잘라서
    나라고 하고,
    생각이라고 하고,
    의식이라고 하면
    손가락 잘린다!!!
  • 24-03-06 모모
    ㅎㅎ...손가락을 보는 순간..그 자체로 둘이 아닌..한마음(도)..인것을..^^

    마음이 특별히 존재하는가?
    보여지는 현상이. 곧... 마음이고.
    들려지는 현상이 곧.. 마음이지..

    물속에 돌을 던지든..지푸라기를 던지든..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그 행위 전체가 다 한마음 인 것을..
    드러난다는건. 마음이 거울에 비쳐침 이라..

    그렇게 보면 되는거지..어디서 찾나?

  • 24-03-06 원정
    이 글은 참고만 해요.
    오로지 지금의 내 느낌이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나도 몰라요.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전 순수의식이 진정한 나라고 느껴져요.
    전 진정한 화두는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뭔가 제가 분리되지 않고 진정한 나(전체)로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내 몸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전체가 한 덩어리의 에너지(또는 끝간데 없는 의식의 장)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허공이 의식의 장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사물과 내가 둘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오로지 의식으로만(그 농도가 100%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존재하는 느낌이 들 때 ‘진공묘유’란 말이 이해가 돼요.
    그 농도는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이렇게 의식이 각성된 상태에서는 생각과 감정이 빨리 알아차려져요.
    확실히 생각과 감정에 의해 덜 휘둘려져요.
    그리고 부수적으로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누가 뭐라해도 저는 이렇게 계속하여 공부를 해 갈 것 같아요.
    이미 저는 그런 흐름에 올라탔어요.
    그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제가 하는 공부는 불교공부라기 보다는 마음공부에요.
    물론 석가모니가 한 공부도 마음공부고, 예수님이 한 공부도 마음공부라고 생각해요.

    모모님 답글은 제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직 느낌으로는 확 다가오지 않네요.
    제가 아직 법안이 열리지 않아서인가 봐요.
    제가 구지선사 글을 쓴 이유는 의식의 각성 상태로 다른 분들을 인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의식이 각성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마음공부가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요.
  • 24-03-07 여원남주
    도반님, 저도 순간적인 느낌만 적어볼게요.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급소를 찌를 테니 준비하세요.

    이 글은 참고만 해요.
    오로지 지금의 내 느낌이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나도 몰라요.
    → 지금과 미래라는 시간관념에 묶여있음.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전 순수의식이 진정한 나라고 느껴져요.
    → 진정한 나가 있다면, 업보죠.

    전 진정한 화두는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관계가 있었고,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존재라는 환상이 있는 것이라면,
    의식이전에 관계가 있었죠.

    그때는 뭔가 제가 분리되지 않고 진정한 나(전체)로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 분리되지 않고, 전체에 녹아 들어가면 관계가 된 거예요. 왜 자꾸 나를 분리하려고 해요.

    내 몸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전체가 한 덩어리의 에너지(또는 끝 간 데 없는 의식의 장)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허공이 의식의 장으로 느껴져요.
    → 허공도, 의식의 장도, 그 이전에 관계가 있어요. 관계가 있고, 존재가 환상으로 셀프인 듯 착각되는 거죠.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사물과 내가 둘이 아니다는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 삼라만상과 하나인 느낌이 관계를 본 것입니다. 연기죠.
    그때, 생각만 빼면 소금인형이 바닷물에 던져져서 바닷물이 되는 건데, 자꾸 생각을 하니 분리되는 악순환에 돌고 돌고 있군요.

    오로지 의식으로만(그 농도가 100%가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존재하는 느낌이 들 때 ‘진공묘유’란 말이 이해가 돼요.
    그 농도는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 존재하는 느낌이 진공묘유가 아닙니다. 관계를 즉, 연기를 볼 때 진공묘유인 거죠.

    참으로 묘한 것은
    이렇게 의식이 각성된 상태에서는 생각과 감정이 빨리 알아차려져요.
    → 생각과 감정이 만날 쓰나미처럼 밀려오나봐요? 알아차리는 걸 도대체 수십 년을 하니까요.
    이제 그만 알아차리세요. 관계만 남겨보세요. 그놈의 질겨서 고무줄같은 '아상'그만 던져버려요. 주어만 빼요.

    확실히 생각과 감정에 의해 덜 휘둘려져요.
    그리고 부수적으로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도 누가 뭐라해도 저는 이렇게 계속하여 공부를 해 갈 것 같아요.
    → 나라는 주어가 공부하면, 주어에게 생로병사가 생기고, 주어에게 알아차릴 일이 생겨요. 좋은 예를 하나 들어보죠. 물을 넘치지 않게 하려면, 수도꼭지만 잠그면 될 일을 그건 안하고, 수도꼭지에는 신경도 안쓰고, 계속 물통에서 물만 퍼내는 수고로움을 해야 한답니다. 수도꼭지만 잠그면 넘치지 않을 것을.

    이미 저는 그런 흐름에 올라탔어요.
    그 과정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제가 하는 공부는 불교공부라기 보다는 마음공부에요.
    물론 석가모니가 한 공부도 마음공부고, 예수님이 한 공부도 마음공부라고 생각해요.
    → 도반님, ‘마음’이 대체 무엇이죠? 마음은 발생시킬 때만 나타납니다.
    석가모니는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어요. ‘일체유심조’에서 얻은 아이디어인가요?

    모모님 답글은 제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직 느낌으로는 확 다가오지 않네요.
    제가 아직 법안이 열리지 않아서인가 봐요.
    → 도반님은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은 듯 보여요. 왜냐하면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있고, 존재를 환상으로 보지 못하며, 관계속에 들어갔다가 습에 이끌려서 계속 ‘아상’을 분리하는 일에 몰두하니까요.

    제가 구지선사 글을 쓴 이유는 의식의 각성 상태로 다른 분들을 인도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의식이 각성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마음공부가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요.
    → 구지선사 글을 직접 썼나요? 몽지라는 사람이 쓴 줄 알았어요. 몽지라는 사람이 연기를 1도 모르면서 만날 불교를 왜곡하고 있더라고요.
    도반님은 불법을 알기 전의 동자승과 거의 흡사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구지선사처럼 한손가락과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동자승처럼 ‘순수의식’을 들어 보이거든요. 관계가 빠져있잖아요. 하나가 되지 못해 분리되어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