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님에게(이중표 교수님의 강의와 관련)5

24-04-01 원정 81

저는 이중표 교수님의 강의에 공감합니다.

다만, 저는 이중표 교수님과는 강조하는 방점이 좀 다릅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갈 길이 먼 상태에서 쓰는 글이니까 참고만 하세요.  


우선, 제가 체험하고 있는 이 현상으로 접근하는 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불교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체험하고 있는 이 현상은 이런 것입니다.

‘의식이 의식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상태(각성 상태)’

이 각성 상태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 상태가 되면 생각이 줄어들고 생각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고 전에 비하여 마음이 한가해집니다.

자신의 업습이 잘 보여 교정의 기회가 생깁니다.

이전에 비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의 상태가 되면 분명히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즉, 진정한 사마타 상태여야 진정한 위빠사나가 되고, 진정한 위빠사나가 되려면 사마타 상태여야 합니다.

그 둘은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상황입니다.

저는 일반 사람들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이게 잘 될지 약간은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각성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됩니다.

저절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기불교가 주로 하는 사념처 수행을 하면, 예를 들어서 호흡을 바라보면, 그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사마타와 위빠사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호흡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즉, 호흡을 관할 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볼 때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볼 때도,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생각은 언제나 과거의 생각이거나 미래의 생각입니다.

생각에 빠져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입니다.

즉, 사념처 수행을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결국 분별하는 마음(생각)이 쉬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깨어난(의식이 각성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에고(생각이)가 쉬어질 수 밖에 없을 때(위기에 처했을 때) 깨어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나 바이런 케이티가 그랬고, 저는 석가모니도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도 삼매수행과 고행수행을 모두 포기하였을 때,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겠지요.

갈 길을 잃었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석가모니의 그 상태는 언제라도 깨어날 준비가 다 된 상태였습니다.

사형수들도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에 담배를 한 대 피울 때 이러한 체험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 글에서 모모님도 어렸을 때 깨어있는 것도 무섭고 잠자는 것도 무서워 하다가 생각이 쉬어지는 체험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가 났을 때 지금 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였을 때 좋은 스승이 곁에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이 상태에 안착했겠지요.

3년 전에 저는 단전을 바라보는 주시자를 느꼈고, 궁금함만 가지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주시자로 존재하였을 때 의식의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의식이 각성되어 어느 정도 순수의식으로 존재하게 되면(안착이 되면) 다른 사람들을 이 길로 인도하는 방편이 보입니다.

제가 상생에서 공(순수의식)을 체험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듯이...

석가모니가 그러한 방편을 제시한 것이 사념처 수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위대함은 생각을 쉬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조사선(설법)은 생각을 쉬게 만듭니다.

깨어난 스승들의 설법은 제자들의 생각을 쉬게 만듭니다.

대승불교의 임제 ‘할’ 덕산 ‘방’이란 방편도 생각을 순간적으로 쉬게 하는 방법이지요.

조사선과 관련하여, 절대로 믿는 스승의 설법을 들으면 제자는 아무런 비판 없이 설법을 듣게 됩니다.

내가 수행을 하면 에고(내가 수행을 한다는 에고)가 강화되는 면이 있는데, 설법을 들으면 생각이 쉬어집니다.


이 마음공부는 내가(에고) 하면 늦어지는 공부이거든요.

내가 공부하면 에고가 더욱 강화되지요.

나(에고)는 ‘오직 모를 뿐’인 입장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되면 의식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제가 볼 때, 조사선(설법)은 석가모니 때에도 있었던 방법이지 대승불교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방법이 아닙니다.

즉, 석가모니는 사념처 수행만 시킨 것이 아니라 조사선의 방식으로도 제자들을 깨우쳤지요.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사용한 조사선(설법)은 에고를 강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좋아 보입니다.

사념처 수행과 우리나라 간화선은 ‘내가 수행’한다는 생각이 들기 쉬운데, 이러한 방법은 깨어난 스승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방편으로 좋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생각이 쉬어져야 의식이 각성되기 쉬운 상태가 되고, 그리하여 의식이 각성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중표 교수님은 이점을 저보다는 덜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하르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가지는 자아탐구법을 통해 진정한 나(참자아, 순수의식)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방법은 선불교의 '이 뭣고' 화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탐구법이나 간화선을 통하여 순수의식(생각이 나오는 자리?)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볼 때 위와 같이 의식의 각성이 이루어지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의 업습을 교정할 기회가 되고, 생각의 본질이 공함을 알게 되니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중표 교수님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이루어지는 상황 및 그를 통하여 얻는 장점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하기 어려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의식이 각성되면 저절로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이루어집니다.

대승불교는 우선 의식을 각성(초견성)시킵니다.

이점이 대승불교(선불교)의 놀라운 점입니다.

  • 24-04-02 여원남주
    인간의 의식과 자아는 관계에서 출현했다/원정님께

    불교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박문호 박사의 뇌과학
    《인간의 의식과 자아는 관계에서 출현했다》
    《존재에서 관계로》
    (링크를 못 거네요. 유투브에서 제목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양자역학 주류학파 코펜하겐 해석
    틱낫한 스님과 중각스님(태고종 이중표 교수님)의 불교를 살펴보며,
    기존의 내가 알던 연기보다 더욱 연기를 명료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뒤집고, 희미하던 것들을 뚜렷이 볼 수 있었죠.
    지금도 더 명확하게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원정님께서는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일방적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내 말에는 집중할 수 없는지 아니면 집중하지 않는지 모르지만,
    "너는 말해라, 나는 내 말만 하겠다"같은 느낌으로, 변화없는 내용의 원정님 말씀만 하시니, 지치지만 그래도 의견을 남길까 합니다.

    오늘은 네 가지만 간단하게 적겠습니다.
    잇몸 수술하러 치과가야 하니까요.

    1. 원정님, 불교를 왜곡하지 마세요.
    마하르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가지는 자아탐구법을 통해 진정한 나(참자아, 순수의식)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방법은 선불교의 '이 뭣고' 화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뭣고?라는 화두를 깨어보면
    體(개념, 명사)로서의 나라는 것이 비어 있더라 이겁니다.
    의식이 각성된 참나가 있는 게 아니고요. 마하르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원정님 말씀이 맞다면 완전 정반대인 것이죠. 선불교의 화두는.
    원정님께서는 體로서의 自我를 自我라고 여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無我에 집착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고요. 불교에서 나를 말할 때는 體와 用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이 말은 붓다의 말씀입니다. 체와 용이 하나된 삶 즉, 업보가 곧 참나인 것이죠. 내가 만들어 가는 삶이 아니라, 삶이 곧 나인 것입니다.

    자아탐구법이나 간화선을 통하여 순수의식(생각이 나오는 자리?)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볼 때 위와 같이 의식의 각성이 이루어지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의 업습을 교정할 기회가 되고, 생각의 본질이 공함을 알게 되니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 데카르트도, 화두 참구하는 수행자도 '그놈'이 있다고 봅니다. 의식이 각성되는 '그놈'이 있다고요. 그러나 관계만 있는 데 어떡하죠? 그렇다면 體로서 自我가 없으면 현상인 이 自我는 뭐냐고요? 그건 '그놈'의 의식의 각성이 착각하는 것이죠.
    自我가 자신의 업습과 自我의 생각의 본질을 관찰하여 두려움을 극복하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自我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行을 통해서는 필연적으로 生老病死가 뒤따르기 때문이죠.

    2.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마세요.
    그래요, 의식의 각성, 순수의식 다 좋아요.
    다만 그것의 목적이 뭐죠?

    3. 불교든 뇌과학이든 양자역학이든 그건 실상을 바로 보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봅니다.
    붓다는 말씀하셨다죠.
    불교를 깨닫는 순간, 즉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불교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불교가 있을 뿐.

    4.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실상을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상이 바로 나라는 현상을 만든 장본인이니까요. ‘모른다’로 접근해서 오직 모를 뿐이 아니라, 끝없이 통찰하면서 실상을 더 명확하게 알면 나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면 사라집니다.

    이 글을 댓글로 쓴 까닭은 아래아한글에서 글을 써서 본문으로 붙이면, 줄 바꿈이 깨어져서 시간관계상 할 수 없이 썼다는 것을 이해바랍니다. 반론을 댓글로 왜 쓰면 안되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규정(?)을 정하셨으니.
  • 24-04-02 원정
    “의식이 각성된 참나가 있는 게 아니고요. 마하르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원정님 말씀이 맞다면 완전 정반대인 것이죠.”
    내 말을 곡해하는 것 같아서, 요 부분에 대해서만 설명할게요.

    위 부분은 제 말을 여원님이 오해한 것이에요.
    즉, 의식이 각성 되어 있고,
    그 각성 사실을 알아차리는 앎(참나, 순수의식)이 있을 뿐이에요.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상태에서도 의식은 각성(의식이 의식을 의식)되어 있어요.
    이 각성은 신체 안에만 있는 느낌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각성을 알아차리는 앎이 있어요.
    그 앎(순수의식)은 몸도, 생각도, 감정도, 밖의 사물도, 별도 달도 알아차려요.
    그 앎이 ‘색’과 따로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저는 이 앎을 공이라고 하고, 순수의식이라고 하기도 해요.
    때로는 참나라고도 하지만, 참나라고 해서 실체가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때로는 제가 우주 전체로서의 존재감을 말하지만, 그 존재감을 알아차리는 자가 참나라고 생각되어요)
    때로는 주인공(주인이되 공하다는 의미로 쓰임)이라고도 하고요.
    여원님 말대로 연기라고 해도 좋고요.
    그러나 그 앎(참나)을 알 수는 없어요. 오직 모를 뿐이에요.
    다만, 눈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대상이 보이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몸, 생각, 감정, 온갖 사물들을 알아차림으로써 그 대상들을 알아차리는 앎이 있다고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에요.
    특히, 의식의 각성을 알아차릴 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나라는 현상의 본질은 신체를 떠나 있다고 느껴지거든요.
    우리는 보통 몸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데, 의식의 각성을 알아차리면 전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되어요.

    저는 때로는 이런 망상을 할 때도 있어요.
    이 전체로서의 느낌은 뭘까?
    우주는 내 몸을 포함하여 한 덩어리의 에너지장은 아닐까?
    빛은 입자이자 파장으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물도 입자이자 파장일 수 있는데,
    나라는 현상은 내 몸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파장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우주 전체를 공으로 느낄 때 나라는 현상의 진면목은 우주 전체의 파장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삼라만상은 색(입자)이지만 그래서 그 자체로 공(파장)은 아닐까?
    물론 이는 망상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비유로서 표현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여하튼 선지식들의 방편에 의하여 의식이 각성이 되면 제가 언급한 장점들이 생겨요.
    여원님이 맛볼 수 없는 장점들이지요.
    그래서 지금의 제 상태는 매우 의미가 있어요.
    특히, 의식이 각성되면 이중표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되어요.
    여원님이 한 번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해보세요.
    여원님의 상태에서는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이 각성되면 저절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상태가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제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저는 이러한 ‘공’도 수단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공에 의지해서 점수를 해 나가는 것 같아요.

    여원님에게 부탁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여원님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나 빼앗아요.
    몇 번을 권유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세요.
    석가모니도 세 번을 권유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포기했어요.
    더 이상 강요하는 것은 에고의 작용일 뿐이에요.

    제가 어설프게 글을 썼더라도 여원님이 제 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상태로 이해하였다면,
    제가 오늘의 이 답글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에요.
    그런데 여원님은 언제나 제 글을 왜곡해서 읽어내 버려요.
    그것이 바로 여원님의 에고의 작용이에요.
    글을 쓸 때 ‘나’라는 말을 뺏다고 에고가 없어지나요?

    마음공부는 논쟁을 한다고 하여 발전하지 않아요.
    이 자리는 옳고 그름을 떠난 자리인데, 논쟁으로 해결되겠어요.
    여원님은 제 말을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사들의 지도에 따라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생각이 쉬어지고 의식이 각성 되게 되어 있어요.
    의식이 각성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되어요.
    그럼 저절로 공부가 되는 겁니다.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요.
    사실 제가 의식의 각성 운운 하는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생각으로 의식이 각성된 그림을 그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좋지는 않아요.

    여원님이 정말로 옳다는 진실이 있으면 여원님이 다른 곳에서 그 진실의 뜻을 펴세요.
    여기서는 혹시라도 여원님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머무세요.
    그게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것이에요.
    그리고 제 글을 ‘여원님이 생각하는 불교’로 한정하지 마세요.
    그게 진정한 불교에요.
  • 24-04-02 원정

    '마음이 부처다',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둘 다 맞는 말인데, 여원님은 이 뜻을 모를 것입니다.
    여원님은 문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상당기간 여원님의 글에는 답글을 달지 않을테니 이해하세요.
  • 24-04-02 여원남주
    1. 원정님, '상생의 세상'에 글을 쓰고 안 쓰고는 내 권한입니다.
    원정님께서 비용을 들여 만들었다고 그런 권한을 행사하시는지요?
    나도 2003년도에 이 공간을 같이 만들었어요.
    내 글이 법적으로 또는 공공질서에 위배되면 따로 조치를 받겠습니다.

    2. “의식이 각성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되어요.”
    원정님의 이 말씀은 맞다, 안 맞다 등으로 반박하는 것을 부질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죠.
    원정님은 의식이 각성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되었다면 되었겠지요.
    원정님은 사마타로 주의집중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되었다면 되었겠지요.
    원정님은 위빠사나로 통찰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한다면 하겠지요.

    다만, 되면 뭐하고, 하면 뭐하나요?
    몇 십 년을 해도 ‘반야’가 발생하지 않는 걸요.
    원정님, 왜 불교에서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겠어요.
    반야로 바라밀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아비달마에서 유위와 무위로 나누면서 궁극의 무위를 ‘열반과 허공’이라고 하며, 그 무위를 얻기 위해서 명상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뭐해요?
    ‘반야’가 발생하지 않아 ‘바라밀’할 수 없는 걸요.
    그렇게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되는데, 왜 그렇게 선불교의 화두를 모조리 엉터리로 깨며, 연기와 공을 도무지 돈오할 수가 없을까요?
    이상한 일이네요. 참으로.
    모든 것은 열매로 그 성격이 규명되는 겁니다. 열매가 없으면 과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저는 뜸시술을 받으면서, 3도 화상을 입어도 모를 만큼 주의집중이 타고 났어요. 그러다보니 외람되게도 반야가 발생하더군요.
    원정님처럼 몇 십 년 동안 노력하지 않아도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되고 있었단 걸 최근에야 알았답니다.

    3. 원정님, 결론은 버킹검인가요?
    순수의식과 에너지장이 남는 군요.
    마치 바닷물이 다 증발하고, 소금이 남듯이 말입니다.
    순수의식이면 심법인가요? 아비달마에서는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더군요.
    에너지장이라면 과학인가요? 과학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가 실상이라고 하죠.
    왜 선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는 불교인데, 아비달마불교는 불교가 아닌지 아세요?

    원정님은
    순수의식으로 보면 유심론자
    에너지장으로 보면 유물론자이겠군요.
    대체 순수의식과 에너지장이라는 의식의 각성으로 뭘 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군요.
    그리고 참고로 빛은 입자이면서 파장이 아니고요. 둘 다입니다. 아니 하나입니다.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닌. 관찰자의 환상에 의해 때로는 입자이고, 파장이죠. 그렇게 바뀌었답니다. 양자역학으로 오면서요.

    5. 답글을 안 쓰도 되고요. 시간을 뺏기고, 안 뺏기고도 원정님의 기회비용 스킬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합니다. 저에게 책임을 묻지 마세요.
  • 24-04-02 여원남주
    '마음이 부처다',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둘 다 맞는 말인데, 여원님은 이 뜻을 모를 것입니다.
    여원님은 문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
    원정님,
    아직 원정님은 마음이 뭔지도 부처가 뭔지도 모르니, 알게 될 때 답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