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중표 교수님의 강의에 공감합니다.
다만, 저는 이중표 교수님과는 강조하는 방점이 좀 다릅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가 갈 길이 먼 상태에서 쓰는 글이니까 참고만 하세요.
우선, 제가 체험하고 있는 이 현상으로 접근하는 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불교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제가 체험하고 있는 이 현상은 이런 것입니다.
‘의식이 의식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상태(각성 상태)’
이 각성 상태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 상태가 되면 생각이 줄어들고 생각으로 인한 고통이 줄어들고 전에 비하여 마음이 한가해집니다.
자신의 업습이 잘 보여 교정의 기회가 생깁니다.
이전에 비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좀 더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의 상태가 되면 분명히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즉, 진정한 사마타 상태여야 진정한 위빠사나가 되고, 진정한 위빠사나가 되려면 사마타 상태여야 합니다.
그 둘은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상황입니다.
저는 일반 사람들이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이게 잘 될지 약간은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각성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됩니다.
저절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기불교가 주로 하는 사념처 수행을 하면, 예를 들어서 호흡을 바라보면, 그 때는 일시적으로나마 사마타와 위빠사나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호흡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즉, 호흡을 관할 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볼 때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볼 때도, 역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생각이나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생각은 언제나 과거의 생각이거나 미래의 생각입니다.
생각에 빠져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입니다.
즉, 사념처 수행을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결국 분별하는 마음(생각)이 쉬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깨어난(의식이 각성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에고(생각이)가 쉬어질 수 밖에 없을 때(위기에 처했을 때) 깨어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나 바이런 케이티가 그랬고, 저는 석가모니도 그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석가모니도 삼매수행과 고행수행을 모두 포기하였을 때,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겠지요.
갈 길을 잃었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석가모니의 그 상태는 언제라도 깨어날 준비가 다 된 상태였습니다.
사형수들도 처형당하기 전에 마지막에 담배를 한 대 피울 때 이러한 체험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 글에서 모모님도 어렸을 때 깨어있는 것도 무섭고 잠자는 것도 무서워 하다가 생각이 쉬어지는 체험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통사고가 났을 때 지금 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였을 때 좋은 스승이 곁에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이 상태에 안착했겠지요.
3년 전에 저는 단전을 바라보는 주시자를 느꼈고, 궁금함만 가지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주시자로 존재하였을 때 의식의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의식이 각성되어 어느 정도 순수의식으로 존재하게 되면(안착이 되면) 다른 사람들을 이 길로 인도하는 방편이 보입니다.
제가 상생에서 공(순수의식)을 체험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듯이...
석가모니가 그러한 방편을 제시한 것이 사념처 수행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승불교의 위대함은 생각을 쉬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조사선(설법)은 생각을 쉬게 만듭니다.
깨어난 스승들의 설법은 제자들의 생각을 쉬게 만듭니다.
대승불교의 임제 ‘할’ 덕산 ‘방’이란 방편도 생각을 순간적으로 쉬게 하는 방법이지요.
조사선과 관련하여, 절대로 믿는 스승의 설법을 들으면 제자는 아무런 비판 없이 설법을 듣게 됩니다.
내가 수행을 하면 에고(내가 수행을 한다는 에고)가 강화되는 면이 있는데, 설법을 들으면 생각이 쉬어집니다.
이 마음공부는 내가(에고) 하면 늦어지는 공부이거든요.
내가 공부하면 에고가 더욱 강화되지요.
나(에고)는 ‘오직 모를 뿐’인 입장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인연이 되면 의식의 각성이 일어납니다.
제가 볼 때, 조사선(설법)은 석가모니 때에도 있었던 방법이지 대승불교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방법이 아닙니다.
즉, 석가모니는 사념처 수행만 시킨 것이 아니라 조사선의 방식으로도 제자들을 깨우쳤지요.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사용한 조사선(설법)은 에고를 강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좋아 보입니다.
사념처 수행과 우리나라 간화선은 ‘내가 수행’한다는 생각이 들기 쉬운데, 이러한 방법은 깨어난 스승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방편으로 좋다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생각이 쉬어져야 의식이 각성되기 쉬운 상태가 되고, 그리하여 의식이 각성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중표 교수님은 이점을 저보다는 덜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하르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가지는 자아탐구법을 통해 진정한 나(참자아, 순수의식)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방법은 선불교의 '이 뭣고' 화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탐구법이나 간화선을 통하여 순수의식(생각이 나오는 자리?)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볼 때 위와 같이 의식의 각성이 이루어지면,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저절로 이루어지고, 그러면 자신의 업습을 교정할 기회가 되고, 생각의 본질이 공함을 알게 되니 생각으로 인한 두려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중표 교수님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이루어지는 상황 및 그를 통하여 얻는 장점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하기 어려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놀라운 결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의식이 각성되면 저절로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이루어집니다.
대승불교는 우선 의식을 각성(초견성)시킵니다.
이점이 대승불교(선불교)의 놀라운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