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다.
앞의 사물들이 통으로(전체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물도 의도적으로 붙잡지(보지) 않고 있다.
‘보면서도 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이 말인 듯싶다.
어떻게 보면 나의 이 상태는 멍을 때리는 상태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뇌 부분이 시원하고 성성하다.
기운 또는 에너지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각성이 되어있다고 표현하고도 싶다. 깨어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앞이 통으로(전체로) 보이면서도 두뇌 부분의 성성함이 저절로 동시에 알아 차려진다. 저절로 회광반조가 되고 있다.
성성함이 드러날수록 성성함을 알아차리는 앎(공)도 더욱 또렷해진다.
그 앎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이렇게 앎은 볼 수도, 느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성성함이 드러날수록 앎(공)도 더욱 또렷해진다.
“경계(사물, 소리, 느낌, 생각, 감정)에 즉해서 깨닫는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경계를 알아차릴 때 알아차리는 앎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석가모니도 새벽별이라는 경계에 즉해서 깨달았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공)이 동시에 드러난다.
무심한 삼매속에서 공을 깨달을 수 없다. 올바른 깨달음은 경계에 즉해서 깨닫는 것이다.
앎(마음)은 따로 없다.
경계가 없으면 어디서 앎(마음)이 일어날까요?
경계와 앎(공)이 동시에 알아차려진다.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이 앎(공)을 드러낸다.
일반 사람들은 내 몸이 몸 밖의 대상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상태는 마치 우주 전체가 하나의 눈처럼 내 몸을 바라보는 듯도 하다.
진정한 나는 우주 삼라만상이 나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우주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닌 듯하다.
나의 상태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해도 좋다.
판단중지가 저절로 되고 있다.
숭산스님의 '오직 모를뿐'은 판단중지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 아무것도 잡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삶이 저절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내가 인생을 산다지만 시절인연이 삶을 이렇게 이끌고 가는 듯도 싶다.
이러한 나의 상태는 나의 업무를 수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움직일 때나 대부분 그러하다.
내가 처음으로 공을 체함한 후 4년 이상을 마음공부에 몰입하여 왔다.
억지로 마음공부에 몰입을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짝사랑 하는 여인을 갈구하는 것처럼 저절로 그렇게 공부를 하여왔다.
그렇게 공부가 되어질 수밖에 없었다.